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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의 길목에서] 김일구 명창

가족과 함께가는 소릿길 즐거워라

무대에서 더 큰 사람. 김일구(66)명창도 예외는 아니다. 소리청 대문을 열고 손님을 반기는 그의 모습은 영락없이 평범한 이웃집 아저씨지만 북채를 잡고 곧추 앉으면 위엄이 느껴진다. 발림이 몸에 배서일까. 목소리도 강단있지만 몸짓이 꽤 크다.

 

그는 이달 중순 전주전통문화센터에서 아들 김경호와 한 무대에 선다. 전통문화센터 기획프로그램 ‘최고의 명창들이 들려주는 판소리 다섯바탕-적벽가’가 그의 무대다. 늘 하는 소리지만 명창에게도 받아놓은 공연날짜는 부담이다.

 

“소리인생만 60년인데, 무대에 설때마다 떨립니다. 또 지금까지 만족했던 공연도 없었고요. 그렇지만 죽을때까지 다 못 배우고 못 풀어낼 것을 알기 때문에 크게 게의치는 않습니다.”

 

그래도 아들과 함께 서는 무대는 신경이 많이 쓰인다. 요즘 밤마다 경호씨와 소리를 맞추며 다듬는 작업을 하고 있다. 아버지의 거친 가르침을 묵묵히 버텨내는 아들이 자랑스럽다.

 

명창도 아버지에게서 소리를 배웠다. 전문소리꾼은 아니었지만 예술에 조예가 깊었던 분이다. 변성기를 맞아서는 외도도 했다. 고생하며 얻은 깨달음이 ‘가장 쉬운 일이 소리하는 것’이었단다. 경지에 오르면 힘이 덜 들겠더라는 생각에서 소릿길로 돌아왔다.

 

아쟁을 배우기 시작했다. 목이 꺽여 소리하기도 어려웠지만 여성국극단 전성기여서 악사 수요가 있었다. 장월중선에게 아쟁과 소리를 익혔다. 강태홍류 가야금산조 명인인 원옥화선생에게서 가야금도 배웠다. 중요무형문화재 준보유자로 지정된 판소리 적벽가는 박봉술선생에게서 수궁가와 함께 익혔다.

 

“예술하는 이들을 하대했어요. 지금은 세월이 흐르면서 가치관도 많이 변했고, 예술인들을 예우하지만 예전엔 그렇지 않았죠. 저도 처음에는 아이들에게 소리공부를 시키지 않았어요. 그런데 생활환경이 그래서인지 자연스럽게 익히게 됐고, 지금은 가족이 함께하는 것이 자랑스럽습니다.”

 

국립창극단과 국립국악원 등지에서 오랫동안 활동했다. 남자명창도 드물었지만 빼어난 통성과 연기력, 게다가 아쟁과 가야금까지 연주하는 그는 인기인이었다.

 

2000년 5월 국립국악원을 정년하며 전주에 정착했다. 사실 그와 전주의 특별한 인연은 없다. 굳이 꼽으라면 1983년 전주대사습 장원, 그리고 해마다 국악인으로서 대사습을 찾았던 것. 그가 전주를 삶터로 택한 이유는 가끔씩 찾은 곳이지만 자신을 따뜻하게 대해줬던 동호인과 국악인들의 온정때문이다. 또 하나, 소리 본고장의 소리판을 확대해보고 싶었던 이유도 있다. 동초제가 강세인 전주에 그가 맥을 잇는 소리, 송만갑제 동편제를 심어 소리판을 풍성하게 하고 싶었다.

 

그는 늘 그의 전수관인 한옥마을내 온고을소리청에 머물고 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제자들과 함께한다. 터를 마련해둔 구이에 전수관도 지을 계획이다.

 

청소년창극도 준비하고 있다. “요즘은 국악인도 멀티플레이어야 경쟁력이 있어요. 그래서 아이들과 창극을 만듭니다. 창극은 소리뿐 아니라 무용 연기 등 다양한 기량을 익힐수 있거든요.”

 

올해 작품은 ‘장화 홍련전’. 그의 아내 김영자명창과 대본준비와 작창 작업이 한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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