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원(桂苑)선생님이 미수(米壽)에 운명을 달리 하셨다는 소식을 접하고 그동안 무심했던 게으름이 가슴을 아프게 합니다. 언제 한번 찾아뵙는다 하면서 영전에 서고 말았습니다.
대서예가이신 계원선생님을 처음 뵙게 된 것은 20여년 전 기자와 서예가로서의 만남이었지만 곧바로 연극인과 후원자로 모양이 바뀌었지요.
1984년부터 수년 동안 선생님은 수십만 원에서 수백만 원에 이르는 돈을 매년 연극협회에 주셨습니다.
선생님의 둘째아들인 ‘병석씨가 연극협회 임원으로 활동하는 것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고 말씀하사면서 “알아서 사용하라”고 하셨습니다.
“왜 도와 주시느냐”는 질문에 선생님은 “순수 예술 활동 중에 가장 열악한 환경이 연극 같아서 도와 줄 터이니 아무도 모르게 하라”고 덧붙이셨습니다.
그러나 저희 연극인들은 그럴 수 없었습니다. 당부 말씀을 어기고 ?계원 연극상?을 제정 했습니다.
지금은 ?전북연극상?이라고 이름이 바뀌었습니다만 10여년동안 계속된 계원연극상은 많은 지역 연극인들의 창작의욕을 북돋아 주셨으며 사기를 높여 주셨습니다. 어디 그뿐이었습니까. 손수 지어 주신 보약 또한 적지 않습니다. 연극인들은 어디 조금만 아프면 맡겨 놓은 양 동양당 한약방을 들락거렸지요,
그 자비하신 은혜에 만분의 일도 보답치 못한 채, 영전 앞에 용서만을 청하는 연극인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특히 매년 시상식 때마다 한민서화회 식구들과 함께 참석하시어 용기와 희망의 덕담을 남겨 주시고 같이 어울려 기뻐하시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오릅니다.
풍남제때 사재를 들여 ?전국서화백일대상전?을 창설 하시고 서예 대중화에 진력하시면서도 절대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셨으며 언제 어디서나 겸손으로 일관하신 계원선생님!
자타가 인정하는 한국서단의 중심부에 서 계시면서도 독특한 서체를 자랑하시지 않으셨던 계원 선생님. 전주시민의 장(88년)마저도 어렵게 드릴 수 있었던 기억도 되살아납니다.
이제는 후회만 남을 뿐, 가까이 다가설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언제나 후덕하시고. 자상하고, 인자하셨던 선생님의 체취를 간직하고 선생님처럼 곧은길을 가는데 소홀함이 없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편한이 쉬시옵서서.
/문치상(전 전북도립국악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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