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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포-영화] 정진우 기자의 Film in - 영화제가 탄생하기까지

jiff 외전 ①

고 탁광 선생. ([email protected])

4월말이면 전주가 다시 영화세상이 된다. 벌써 일곱번째 전주국제영화제(이하 JIFF)가 두달여 앞으로 다가왔다. 지난 2000년 첫발을 내디뎠을 때만 해도 ‘과연 성공할수 있을까’했던 JIFF가 이제 유치원에 갈 나이가 됐다. 그만큼 연륜과 애환을 켜켜이 쌓았다. ‘필름 인’은 JIFF가 시작하기 전까지, JIFF의 뒷얘기들을 들춰보려고 한다.

 

1999년으로 되돌아가본다. 당시 전주시는 영상도시를 만들겠다고 팔소매를 걷어부쳤고, 그 일환으로 ‘영화제개최’를 꺼내들었다. 지난 50∼60년대 ‘아리랑’과 ‘피아골’‘선화공주’등을 앞세워 한때 전성기를 구가했던 전북영화사를 되살리겠다는 밑그림이었다. 이는 당시만 해도 고(故) 탁광 선생이 생존해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아리랑을 만들고 전국적으로 흥행에 성공했을 땐가. 충무로에 나서면 우리를 보고 수근거렸어. 전주촌놈들이 대박을 터뜨렸다고 말여”라고 너털웃음을 지어보이던 탁광 선생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영화제에 앞서 열렸던 공청회에서 “영화제가 성공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며 나이 어린 조직위관계자들을 향해 고개를 숙였던 탁광 선생은 아쉽게도 제1회 JIFF가 열리기 몇달전 영면하셨다.

 

당시 전북일보는 일년에 걸쳐 전주영화계의 역사를 재현하는 등 JIFF의 이론적 토대를 그려가는데 애를 썼다. 우석대도 재정적인 지원을 약속했고, 그 약속은 지금도 지켜지고 있다.

 

당시 부산영화제와 부천영화제에 이어 세번째 국제영화제를 표방했던 JIFF는 ‘또하나의 국제영화제’라는 부정적인 인식을 ‘전혀 다른 또하나의 영화제’로 바꿔야하는 과제를 안고 있었다. 이를 위해 꺼내든 게 당시만 해도 낯설었던 ‘대안’과 ‘디지털’이었다. 초대 조직위원장은 최민씨가, 프로그래머는 김소영·정성일씨가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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