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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포-사람과 풍경] "사람은 숲 없으면 하루도 못살죠"

나무인생 임실 백련산 농장 정종술 대표

백련산 농장 정종술씨 부부가 조경용 소나무를 돌보며 활짝 웃고 있다. ([email protected])

"숲은 사람이 없어도 살지만 사람은 숲이 없으면 살 수 없습니다"

 

평생을 나무만 싶어 온 임실 백련산농장 정종술 대표(61).

 

구릿빛 얼굴에 굳은 살이 박힌 굵은 손마디에서 그의 질박한 나무인생이 느껴진다. 하지만 한 평생 나무와 함께 살아 온 그는 환갑을 넘겼음에도 아직 40대 못지 않은 젊음과 싱그러운 나무향기가 배어나온다.

 

정 대표가 나무심기에 인생을 올인한 것은 30여년전. 20대 후반인 1974년부터 나무심기에 나섰다.

 

"헐벗는 산림 녹화같은 거창한 사명감이나 나무심어 큰 돈을 벌겠다는 생각은 전혀없었습니다. 그냥 나무심는 것이 좋았고 나무농장이나 하나 가꾸었으면 하는 작은 소망으로 시작했습니다" 그가 나무에 미친 이유는 너무 소박하고 간단했다.

 

정 대표는 먼저 나무 심을 땅이 필요했기에 값싼 부지를 구하려 도내 곳곳을 물색하던중 임실 강진면 방현리 이윤마을을 찾았다. 지금이야 도로가 뻥 뚫리고 포장이 돼 대형 화물차도 진입할 수 있지만 당시에는 산 골짜기 비탈길이 유일한 통행로이어서 동네사람들이 '송아지가 들어와 어미 소가 되면 동네를 나갈 수 없었다'고 말할 정도로 산간오지였다. 때문에 땅 한평가격이 당시 알사탕 2∼3개값 수준인 10∼20원에 불과해 적은 돈으로 땅을 구입하는데 적지였다.

 

"가진 돈을 털어 임야 6만평을 구입해 잣나무와 낙엽송 수만 그루를 심었습니다. 나무 심는 것이 재미있어서 10만5000평을 추가로 매입해 계속 나무만 심었죠"

 

총각신세를 면하려 78년에 부인 강복석씨(55)와 결혼했다. 또 나무로는 소득이 전무한데다 가장으로서 책임감때문에 79년 임실군청에서 공무원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나무심는 일은 그만 둘 수는 없어 돈만 생기면 땅을 사고 나무심기를 계속했다.

 

"주말과 휴일에는 오직 나무심는 일에만 매달렸습니다. 친·인척 결혼식이 있어도 축의금만 보내고 모악산이 바로 옆에 있는데도 지금까지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습니다"

 

부인 강씨도 이 같은 남편의 의지를 꺾을 수 없어 결국 가정의 평화(?)를 위해 후원자로 나섰다.

 

다행히 강씨가 시중은행 직원으로 근무했기 때문에 가족들 생계는 어느정도 꾸려갈 수 있었다.

 

"지금까지 남편이 생활비 한번 준 적이 없습니다. 남편 월급은 모두 땅사고 나무심는데 쓰고 그것도 모자라 빚까지 내어 투자했습니다" 부인 강씨는 그러나 남편이 좋아서 하는 일인 만큼 독림가의 길을 막지 않았다고 한다. 오히려 나무 살 자금이 필요하다하면 여기저기 돈을 꾸러다녔다.

 

"나무를 사야하는데 돈이 없어 처음에는 결혼반지 등 패물을 처분한데 이어 아이들 돌반지까지 모두 팔았습니다. 나중에는 가까운 이웃들과 친척·친구들에게 까지 돈을 빌렸습니다. 사채가 눈덩이처럼 늘어나자 친정 어머니가 친척과 친구들에게 '망해도 혼자 망하게 돈을 빌려주지 말라'고 막더군요"

 

결국 정 대표는 조림수종 식재만으로는 소득은 커녕 망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80년대부터는 유실수도 함께 심는 복합영림사업으로 전환했다.

 

"산 비탈에다 무슨 나무를 심을까 고민했는데 동네 가운데 약 80년된 호도나무에 호도가 주렁주렁달린 것을 보고 바로 이것이다 했죠" 정 대표는 호도나무가 고산지대에서도 잘 자라고 상품성도 더 뛰어나다는 사실을 알고서 7년동안 6만여평에 6000여그루를 심었다.

 

"호도나무를 심자 주위 사람들이 '미친 놈'이라고 손가락질을 하더군요. 중국산 호도가 밀려들어오는데 망할려고 호도나무를 심느냐는 것이였죠. 정부에서도 보상금을 줄테니 나무를 베어내라고 하더군요" 그러나 정 대표는 자식같이 키운 나무를 죽일 수 없어서 오기로 버텼다. 그것이 오늘날 정 대표의 나무인생이 성공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됐다.

 

간벌을 하고남은 3000여 그루에서 매년 7∼8톤씩 호도를 생산, 연간 7∼8000만원의 소득을 올려주는 효자나무가 된 것이다. 특히 정 대표의 호도나무는 해발 6∼700미터의 고산지대에서 재배하기 때문에 호도알이 튼실하고 속껍질이 얇은데다 고소한 맛이 탁월해 특상품으로 쳐준다.

 

"호도에는 불포화지방산과 필수아미노산이 풍부해 요즘 웰빙식품으로 각광을 받으면서 서울 천안 등지에서 주문이 쇄도합니다. 가을철 수확하자마자 동나 아는 사람들이 달라고하면 미안함 뿐입니다"

 

정 대표가 지난 32년동안 나무심기에 몰두해 온 결과, 지금은 30여만평에 달하는 대농장 주인이 됐다. 그동안 투자한 돈만도 30여억원이 넘는다. 그의 청년시절 소박했던 꿈이 실현된 것이다.

 

"아직도 빚이 많지만 망하지 않은 것은 일찍부터 복합영림사업에 나선 것이 주효했기 때문입니다" 그에 농장에는 호도나무 뿐만 아니라 은행나무와 고로쇠, 느티, 단풍나무, 조경용 소나무 등이 발디딜 틈도 없이 빼곡히 들어서 있다.

 

조림에 기여한 공로로 85년에 임실군민의장 산업장, 92년에는 정부로부터 산업포장을 받았다. 지난해 1월에는 노무현대통령 초청으로 청와대 만찬에도 참석했으며 현재 전국 임업경영인회 부회장으로 활동중이다.

 

정 대표는 나무농사 못지않게 자식농사도 성공했다고 주위에서 평한다.

 

큰 딸 정현씨(27)는 고대 법대재학중 사법시험에 합격, 현재 서울동부지청 검사로 재직중이고 한양대 총학생회장 출신인 둘째 딸 정은씨는 올해초 대학 졸업후 교사임용시험을 준비하고 있으며 아들 병권씨는 대학을 휴학하고 군복무중이다.

 

"나무를 심다보면 어두어져 손전등을 들고 새벽까지 나무를 심은 적도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녀들을 제대로 돌보지 못했는데 부모를 이해해주고 스스로 잘 성장해줘 아이들에게 고마울 따름입니다"

 

이제 정 대표에게 남은 소망은 나무심기 위해 결혼패물을 처분한 아내에게 반지 하나 선물하는 것과 평생 타보지 못한 비행기를 부부가 함께 타보는 것이 소원이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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