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란한 21세기를 바라보며 산다는 게 나는 감사합니다. 펜을 줘서 글을 쓰게 해 주신 것도 고마운데, 쓰는 걸 귀찮아 할 수는 없지요.”
“사람이 산다는 것은 잔인한 것”이라고 생각하던 시절도 있었다. 그러나 오늘은 모든 것이 고마운 때. 여든이 넘어서야 알게 됐다.
수필집 「그리움의 나라」(교음사)를 펴낸 목경희씨(80).
한 때 교단에도 섰었지만 그의 젊은 날은 ‘패션디자이너’로 잘 알려져 있다. ‘순미사’라는 양장점을 운영하며 1969년 도내 최초로 패션쇼 ‘제1회 목경희 의상발표회’를 열기도 했다.
여든이 넘어서까지 남아있는 것은 글 쓰는 일. 지역에 여류문인들이 거의 없던 시절, 그의 글쓰기는 시작됐다. 이기반 최승범 시인의 권유로 1968년부터 「전북문학」에 글을 썼다.
40∼50대에 쓴 글을 모았다 회갑이 되어서야 펴낸 「먹을 갈면서」는 할 말 다 못하고 가려서 한 탓에 오히려 행간의 의미가 깊었다. 모녀산문집 「분홍옷 갈아입고 꽃길을 가네」는 암으로 딸을 앞세운 슬픔으로 쓴 것. “모녀산문집 이후로 글에 대한 욕망이 더 커졌다”는 그는 스토리텔링 위주로 짜여진 이번 수필집을 조심스럽게 내놓았다.
“내 인생을 벗겼다고 해야할까요. 글 쓴다는 핑계로 우리 엄마 아빠를 너무 발가벗겨 놓은 것 같아 마음이 아파요.”
그는 ‘벗겼다’는 표현을 썼지만, 1926년생이 살아온 시대는 벗기지 않으면 아무것도 나올 수 없다. 동상면 좁은 골짜기에서 기어나오고 싶었던 심정, 밤팃재에 어린 동생을 묻던 날, 정신대를 피해 한 약혼……. 수필은 그 사람을 가장 솔직하게 나타내는 문학이란 걸 알면서도 그는 여든이 넘어 꺼내놓은 이야기가 죄스럽다.
“나 또한 후세들에게는 고향일진대 그들에게 그리움으로 읽힐 멋진 글 한 편 써보고 싶은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길이 참으로 먼 곳에 있다는 것을 이번에 절절히 깨달았어요. 능력의 한계 앞에서 절망하면서도 오늘이 끝이라는 생각으로 글을 썼습니다. ”
한 줄을 쓰더라도 대상을 관찰하고 자료를 찾아쓰는 성격 탓에 지금은 사라진 고향, 완주군 동상면 시평리를 여러차례 더듬었다. 그는 “어느날 갑자기 천둥벌거숭이처럼 무딘 펜 한 자루 고쳐잡고 찾아나선 고향은 하나도 늙지 않았다”고 말했다.
조악하지만 그 때의 삶이 더 그립다. 되돌아보니 전부 그리움이라는 목씨. 껴안는 마음으로 쓴 글이 순해진 것은 당연하다.
전북고녀를 졸업, 현재 한국수필문학가협회·한국크리스천문학가협회 이사를 맡고있으며, 한국문인협회·전북문인협회 회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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