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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있는 아침] 자연생과 옮겨 심은 나무는 뿌리가 다릅니다. - 류희옥

지난밤, 바람이란 바람이 아무도 모르게 찾아와 지상에 나타내는 모든 것들을 사정없이 흔들고 지나갔습니다. 몸놀림이 유연한 것보다는 거세다고 우쭐대는 나뭇가지일수록 상처는 더더욱 심하고 어떤 것은 처절하게 피를 흘리기도 하였습니다. 그뿐아니라 어떤 가로수는 통째로 나자빠져 치맛자락 걷어올린 여인의 속살처럼, 보여서는 안될 부분을 허옇게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이유야 바람이 드센 탓도 있었지만, 자리를 옮겼던 탓으로(자기의 뜻과는 무관하다고 말하지만) 원뿌리가 없이 잔뿌리만 무성했던 때문이었다고 곁에 있던 나무들이 한결같이 입을 모아 말했습니다. “자연생과 옮겨 심은 나무는 뿌리가 다릅니다”라고.

 

 

- 시집 <바람의 날개> 에서

 

그 어떤 광풍이라도 뿌리만 튼튼하다면…

 

언뜻 보아 일반 산문처럼 보이나 틀림없는 시이다. 운문이냐 산문이냐의 여부는 문장의 길고 짧음에 있지 않고, 그 운율에서 찾아야 한다. 옛날 시조나 창가에서는 규칙적인 외형률을 중시하였지만 이른바 자유시에서는 안으로 품고 있는 내재율에 보다 근거를 두고 있다. 이 작품은 제목과 본문 공히 산문같지만 천천히 읽어보면 악조음이 전혀없는 훌륭한 내재율을 안고 있다.

 

이 시의 줄거리를 요약하자면 아주 간단하다. 간밤에 광풍이 몰아쳐 가로수가 통째로 뽑힐만치 사정없이 후려치고 간 것이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정작 시인이 들려주고 싶은 말은 따로 있다. 첫째, 몸놀림이 가늘고 유연한 나무보다 ‘거세다고 우쭐대는’ 나뭇가지일수록 상처가 더욱 심하고 처절했다는 사실과, 다음은 바람이 드센 탓도 있지만 그 보다는 자리를 옮김으로 인해 ‘원뿌리가 없이/잔뿌리만 무성했던 때문’에 그 피해가 더욱 컸던 것으로, 급기야 ‘자연생과 옮겨 심은 나무는 뿌리가 다릅니다’로 끝을 맺고 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이런 진술을 시인, 즉 사람의 입을 통해서가 아니라 ‘곁에 있던 나무들이’ 한 목소리로 증언케 함으로써 끝까지 인위적인 것을 배제했다는 사실이다. 만일 시인이 전면에 나와, 모름지기 사람은 우쭐대지 말고 항시 겸손해야 하며 어떤 난세에도 신념과 지조를 지켜야한다라고 역설한다면 그것은 시가 아니고 나이 드신 교장선생님의 훈화가 될 것이다.

 

/ 허소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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