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속에 감추어진 비의(秘意)를 불러오는 아이가 있었다. 또한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은 어디엔가 있기 마련이었다.
소년은 정강이를 접은 채 강가에 고요히 앉아 있었다. 소년을 바라보면서 아직 세상에 저런 아이가 남아 있구나, 하고 여겼다. 이 고요한 아이가 흐느끼면 세상 한쪽에는 비가 내릴 것 같았고, 이 아이가 웃으면 지구 반대편 바다에는 높은 파랑이 일 것 같았다.
소년에 대한 첫 느낌은 피뢰침을 통해 전해온 전기충격과도 같았다. 그것은 머리끝에서 발가락 끝에까지 온몸을 관통하는 강렬하고도 불길한 것이었다. 인생을 살다보면 한번쯤 만날까 말까한 그런 것엔 그만한 이유가 있을 법한데, 소년은 그 이유조차 알 수 없고, 그것을 표현하는 데 내 스스로 무딘 한계를 바라봐야 했다.
속세에서 소년은 세속적이었으나, 소년의 세속에는 사람들의 찌든 속세가 들어 있지 않았다. 아주 오래 전 사람들이 버린 속세의 그 무엇들은 소년의 세속에서 유효했는데, 밤하늘에 떠있는 별자리 이야기가 그러하였고, 외뿔 달린 도깨비 이야기가 그러했으며, 맑은 개울에서 헤엄치는 쉬리와 연어와 빙어 떼 등의 눈에 잘 띠지 않는 것들이 그러했다.
때로 소년은 햇빛이 잘 드는 곳으로 나아갔다. 그럴 때면 소년의 머리 위로 금빛 나비가 팔랑거리며 날아다녔다. 하늘 낮은 곳에선 가릉빈가(迦陵頻伽)의 새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소년이 눈을 들어 먼 곳을 바라보면 그곳은 오래 전 세상에서 지워진 색채를 불러오듯 긴 무늬를 늘어뜨렸다. 소년의 입에서 노래가 흘러나오면 세상은 세상 밖의 소리를 불러오듯 더한층 고요해져 무덤 속 같았다.
소년의 웃음에는 소리가 없이 깊고 맑았다. 곧은 자세로 빈 들에 서면 한쪽 복사뼈를 감춘 왜가리 같아서 그것의 날갯짓이 어떠한지 건드려 보고픈 충동이 일었다. 소년의 발길이 물가에 닿으면 여름날 물 위를 헤엄치는 소금쟁이의 물장구 같아서 그것의 잔잔한 파장을 깨트려놓고 싶었다.
햇볕이 모여든 수면 위로 빛들이 뛰어 오르면서 오후의 시간은 지난 여름에 말라죽은 가재처럼 버석거렸다. 그것들의 버석거림에는 날 것의 나프탈린 냄새가 맡아지지 않았고, LLRICE 601 유전자변형 물질과 포름알데히드 발암물질이 섞여 있지 않았다.
순수한 결정에는 저 나름의 속성을 지니고 태어나는 것인데, 소년을 둘러싼 산과 들과 하늘과 바람의 순조로움이 그러했다. 온전하지 않은 것들이 모두 오후의 빛과 소리를 받아들이면서 온전해지고 있었다. 소년에게 물었다.
“너는 어디에서 왔니?”
“강 건너편에서 왔어요.”
그곳은, 예전 얕은 산등성이 굴곡을 이루었고, 겨울이면 깡깡 얼어붙던 너른 미나리깡이 자리한 곳이었다. 지금은 아스팔트가 깔리고, 웅장한 빌딩이 신축을 위해 공사가 한창이었다.
“그런 자세로 오래 앉아 있으면 다리가 저리지 않니?”
“이게 내 일인 걸요.”
다리가 저릴 법한데, 대신 소년은 눈을 들어 반짝였다. 소년의 눈은 우물이듯 맑았다. 검고 깊었으며, 때로 푸르스름한 색채를 띠곤 했다. 여느 아이와 마찬가지로 청량감이 눈 속에 살아 있었다.
소년이 눈을 반짝일 때, 소년과 무관해 보이는 따사로운 햇살이 수면에 부서져 내리면서 알 수 없는 먼 곳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는, 소리가 없는 곳으로 밀려가서는 강 건너 넓고도 황량한 개활지 위에 흩어져 내렸다. 소리가 퍼져가는 곳을 향해 소년은 오래도록 시선을 멈추었다. 소년이 물었다.
“아저씨는 나를 통해 무엇을 보세요?”
“세상의 물욕과 번민과 더러움을 걸러낸 뒤의 맑음을 본단다.”
소년의 눈길은 고요했다. 저 아이의 눈 속엔 세상을 억압하는 모든 것들을 비워낸 뒤의 영롱함과 맑음이 그득했다. 그런 소년이 침울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그리곤 속삭이듯 낮게 소리를 냈다.
“아저씨는 아름답고 소중한 것들을 다 버리고 빈 껍질만 보고 있어요.”
아이의 말이 어려웠다. 고요한 아이의 언어는 이렇게 어려워도 되는 것인가, 무언가 억울한 생각이 들었는지 나는 목소리를 높였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니?”
“아저씨 손에 쥔 그것이 그렇게 말하고 있으니까요.”
그제야 내 손에 붓이 쥐어져 있는 것을 알았다. 그 한 자루 붓으로 세상을 그리겠노라고 마음을 다잡은 적이 있었다. 세상 멀리에서 세속과, 세속을 떠난 그 어떤 것을 그리기 위해 해가 지는 곳을 오래도록 바라본 적도 있었다. 그때마다 세상을 압도하는 고요와 고요 속에 성글어지는 어떤 빛들을 보았는데, 그것들은 참으로 곱기도 하고 눈에 시리기도 했었다.
소년의 손과 내 손을 번갈아보면서 머리 속에 불꽃이 피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소년은 길에 널린 흔한 돌조각 하나 손에 쥐고 있지 않은 것이었다. 그때 멀리 세상 밖에서 거대한 회오리가 불어가면서 천둥소리가 울려왔고, 그것들은 일제히 나를 향해 내리치며 온몸을 뚫고 지나갔다.
“아저씨가 바라보는 그것들은 오래 전 세상에서 사라졌어요. 그건 아저씨의 마음 일뿐이에요.”
내 손에 쥐어진 욕망의 부스러기가 돌연 부질없음을 알았을 때, 소년에 대한 생각들이 너무 주관적이었거나 감상적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나는 돌맹이 하나에도 세상 그 어떤 물욕과도 바꿀 수 없는 생명력을 볼 수 없었다. 그러면서 붓 하나로 세상 속에 감추어진 아름다움을 그리겠다고 호언하지 않았던가.
그제서야 흐리던 시야가 확 트이는 느낌이 들었는데, 지금까지 내 시각을 긍정하기 위해 얼마나 많이 세상을 부정해 왔는지, 너무 오래 세상의 낡은 껍질만을 바라본 것은 아니었는지. 그것이 내게 와야 할 것인지, 오지 말아야 할 것인지, 그런 생각도 들었다.
세상 앞에 무수히 그려놓은 그것들은, 진정 세상이 바라는 그림이 될 수 없었다. 어쩌면 소년이 세상 속에 감추어진 비의를 불러올 것이라는 섣부른 오만이 불러온 결과일지 모를 생각도 들었다.
만약 저 아이가 소나무 아래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 한 손을 들고 한 손을 슬며시 내밀었다면, 그로인해 나는 생의 아득한 끝을 보게 되는 것은 아니었을지. 그때까지 소년은 언 겨울 숲에서 나무 하나를 뚫어보듯 선한 눈길로 내 손을 바라보고 있었다.
◇ 서철원(소설가)
2000년 '작가의 눈' 신인상 소설부문 당선. 연작 <겨울, 1975> , <타인의 우물> , <호모 아니키스트> 등 다수의 작품 발표. 전북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 호모> 타인의> 겨울,>
저작권자 © 전북일보 인터넷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아래 경우에는 고지 없이 삭제하겠습니다.
·음란 및 청소년 유해 정보 ·개인정보 ·명예훼손 소지가 있는 댓글 ·같은(또는 일부만 다르게 쓴) 글 2회 이상의 댓글 · 차별(비하)하는 단어를 사용하거나 내용의 댓글 ·기타 관련 법률 및 법령에 어긋나는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