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 아픔을 안고 청년으로 살아온 여든 고개 시인...옛 선비의 기개를 떨치다
'휘내닫는 불길은 아우성으로 후끈거리더니 / 불꽃 튀듯 후두둑거리더니 마침내’(시 「다시 푸른 겨울」 중) 왔다던 1987년 6월. 당시 전주 팔달로에 모여든 이들은 들판처럼 거칠었던 그곳에서, 한길 가득 ‘도도한 불빛의 흐름’을 만들었을 것이다. 20년이 흘렀다. 그러나 그토록 목놓아 부르던 꿈은 여전히 신기루. 오늘도 광장 이곳저곳을 유전하며 배회한다. 겹쳐 떠오르는 사람, 1987년 6월항쟁부터 1991년 12월까지 이 땅 민주화운동을 대하 서사시로 형상화한 최형 시인(80)이다.
이 땅 아픔을 안고 청년으로 살아온 여든 고개 시인
선생은 늘 부지런하다. 지난 3일도 ‘6·15 공동선언 7돌 기념 통일염원 단축마라톤대회’와 ‘동학혁명기념관 개관12주년 기념식’을 다녀오는 길이었다. 여든을 넘는 고개, 약간 구부정한 모습으로 힘겨워 보였지만, 내딛는 걸음은 옛 시대 선비를 닮았다. 구상 시인이 “만일 전주 선비의 그 어떤 전형이 있다면 나는 바로 그가 판박이 일 것”이라고 썼던 글이 떠오른다. 이문구 소설가도 자신의 병상일기에 선생과의 해후를 “옛 시대의 선비적 행보를 오랜만에 보는 셈”이라고 적지 않았던가. 예의 힘찬 목소리와 형형한 눈빛은 그대로였다.
“그때만 해도 젊었는데, 딱, 20년 전이네.”
1987년, 당시 이순(耳順)이였던 선생은 ‘젊음’으로 말문을 열었다. 젊음의 무서움을 강렬하게 일깨워준 당시 청년들에 대한 이야기.
‘저 최루탄 가스와 그 소리 요동치는 속에서도 / 끝내 사자후를 토하는… 아, 저 힘! / 저 젊음! 젊음의 기막힌 힘이여!’(시 「다시 푸른 겨울」중)
80년대와 90년대, 운동현장을 헤집고 다녔을 ‘혈기 왕성한 60대 청년’.
“84년에 자원명예퇴직을 하고, 한 1∼2년 있다가 결국은 뛰어들어갔지. 비로소 내가 할 소리, 하고 싶은 소리를 할 수 있었던 거예요.”
속절없이 기다려본 사람은 안다. 기다리는 그 속에 얼마나 많은 능선과 골짜기와 낭떠러지가 있는지……. 한국전쟁, ‘인공’의 소용돌이에서 ‘면 인민위원회’ 일을 했던 선생은 이후 3년 동안 도피와 토굴, 입산 생활로 호된 신고를 겪는다. 그 체험은 ‘나는 지금 무덤 속 같은 토굴 생활을 하면서, 이런 체험기나 적어보는 것으로 숨막힐 듯한 ‘누우런 질식’을 달래고 있다’(소설 「산골짝 겨울」)에서 짐작된다. 이후 전남 강진과 곡성, 전북 김제와 전주, 군산 등에서 30여년 이어진 교사생활. 그는 「들길의 풀꽃」 머리말에 이렇게 남겼다.
‘옛날의 핏자국이야 어떻든 제도권에 오래 안주해 온 나로서 무슨 긴 소리 늘어놓을 후안스러움이겠는가? 할 말은 많고도 없다. 이래저래 줄곧 비틀린 고독이 내 분수임을 자각한다.’
‘누우런 질식’과 ‘비틀린 고독’. 선생의 고백은 슬프지만 당당하다. 바람이 불면 나무 뿌리는 깊어지는 것. 의뭉스럽고 심란한 세상은 그에게 잠시 잊고 있던 문학의 열정을 싹틔우게 했고, 세상을 바로 볼 수 있는 힘을 주었다. “문학청년기는 내 인생 격동기의 한고비였다”는 그에게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 투르게네프의 작품들은 새로운 시안(詩眼)을 안겨주었다. 도피 생활 당시, 어둠 속 유일한 숨통이었던 토방굴뚝(토방 밑으로 뚫린 구멍)으로 종달새 울음소리가 들렸던 것처럼. 시간은 결코 물리적인 성격만 가진 것이 아니다. 그 안에 다분히 심정적인 성격이 지배하는 영토다.
‘무엇을 써야 하는가?’ 철저한 자기확인과 안온함에서 벗어나는 일. 시간은 포위망을 좁혀오듯 그를 에워싸기에, 나이든 시인은 더 분주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결국 ‘보통의 생활인’에서 ‘싸우는 사람’으로 되돌아 온 그는 지금도 심장에서 쏟아져 나오는 단어를 옮기기에 분주하다.
“글쓰기에서 민중이 아예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면, 혼자만의 살풀이춤이나 또는 오락거리만에 그치기 쉽지. 새삼스레 이상(李箱)의 뒷북을 치거나, 사랑 노래를 하는 축이 부쩍 늘고 있는 것을 보고 있자니, 내 어쩌면 젊음이 시새워지는 속내인지도 모르겠지만, 유쾌할 수만은 없어요. 이른바 포스트모더니즘적 탈이념 탈이상을 지향하는 시늉으로, 쉬운 것도 어렵게 표현하고, 엘리어트식 난해시의 또 다른 복사판이 되고 있지나 않은지, 되돌아보았으면 해요. 무슨 문명사적 시각일지라도 그렇지요. 우리네 현실은 문학인이래서 외면해버려도 좋을 만큼 제대로 되어 있지 않잖아요? 잘 알지요?”
이데아와 서정의 행복한 결합. ‘저항’이 없어지면 ‘문학의 고뇌’가 희미해지기 마련이지만, 그의 샘은 절대 마르지 않는다. 여봐, 창작활동도 더러 하는가, 선생이 던진 말. 손끝이 무뎌진다.
“문학은 그 시대의 중요한 문제를 던져줘야지. 작가라면 건강한 도덕성과 바른 역사의식을 가져야 해. 길게 멀리 원대히 볼 줄 알아야 해. 긴 호흡으로 세상을 이겨야지. 내 자신에게, 내가 그리는 모든 것에 굉장히 엄격하게, 자네는 지금 아주 초창기여.”
이 수상한 시대에도 신록은 푸르다. 착오(錯誤)적인 글쓰기는 경계할 일이다.
최형 시인과 '다시 푸른 겨울'
왜 진즉 이 책을 펼쳐보지 않았을까. 1990년을 전후한 민주화 운동을 형상화한 『다시 푸른 겨울』(시와사회, 2000). 이 서사시는 노(老) 시인의 눈물겨운 현장 체험의 진솔한 기록이며, 지면 안 되는 싸움, 그러나 질 수 밖에 없었던 싸움에 절망적으로 매달리던 그 시절 이 나라 사회운동가들의 처절한 기록이다. 어두운 권력에 솟구치는 시인의 속내다. 민주화의 문을 열었다는 6·29가 과연 우리 현대사에서 어떤 의미인가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이 길고 긴 서사시는 민주화를 가져온 사람들의 고귀하고 치열했던 삶과 암울했던 역사와 고난을 어지간히도 생생하게 우리 앞에 털어놓는다. 시인이 굳이 서사시의 형식을 택한 이유는 시집을 읽어 내려가면서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시인의 숨길 수 없는 정서를 은유와 상징으로 가슴을 파고들었던 것. 그 당시 치밀한 산문정신으로 현실을 총체적으로 형상화하는데는 더 많은 시간이 요구되었으리라. 신동엽의 「금강」이나 조병화의 「고려의 별」 역시 이러한 인식에서 사회의 변혁운동과 발걸음을 같이해 문학의 정치성을 극대화하는 참여하는 시인의 목소리가 담긴 것이다. 정양시인은 “우리시대의 진실을 밝히고 정의를 구현하려는 등장인물의 열정이 눈물겹고 아름다운 꽃밭처럼 때로는 장엄한 불꽃처럼 타오르는 이 시는 소설적 감동과는 또 다른 열정과 감동이 현장성과 더불어 너무나 생생하다”고 말한다. 현대인들에게 6월 항쟁은 머나먼 과거다. 그러나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과거이며, 현재다. 너무도 뻔한 명제를 선생과 이 책을 만나고서야 다시 깨달았다.
선생에게서 『푸른 겨울』을 빌렸다. “내가 젊을 때, 한창때 겪은 체험이여. 6·25를 직접 겪지 못했으니까, 선배 문인이 겪은 체험을 선배의 글을 통해서 후배가 경험해야지.” 선생의 ‘인공 시절’을 통해 한국전쟁을 조명한 『푸른 겨울』(창작과비평사, 1989). 책을 펼치며 나는 여전히 긴장된다.
선생은 1928년 전북 김제에서 출생했으며 동국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했다. 교직에 종사하다가 1984년 자원 명예퇴직, 집필 생활을 하며 사회운동 단체 등에서 활동해오고 있다. 첫 시집 『푸른 황지』(1970) 이후 『두 빛살』(1975) 『강풀』(1981) 『이런 풀빛』(1985) 『돌길의 풀꽃』(1991) 『들길』(2003), 서사시 『푸른 겨울』(1989)과 『다시 푸른 겨울』(2000), 수필집 『해와 강의 숲』(1979) 『들바람 부는 길』(1993) 『비망록』(2003), 소설집 『건널목 햇살』(2001)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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