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효자노릇' 지금은 원전 들어서
백합이라는 조개가 있다. 백합은 크기와 겉모습이 황홀하다고 해야 할 만큼 대단한 것이다. 다 자란 것은 어른 주먹만한 크기이니 우리나라 갯가에서 나는 껍질 두 개짜리 조개 가운데 가장 큰 것이다. 이것을 혹시 '대합'이라는 조개와 혼동할 지 모르지만 대합과는 외모가 너무나 다르다. 사람도 키 큰 사람 치고 싱겁지 않은 사람이 없고, 쓸 데 없이 쑥쑥 자란 대나무를 '멀대'라고 하듯이, 해물잡탕에 나오는 대합을 보면 호박처럼 크기만 하지 겉모습은 하염없이 거칠고 속 알창은 시커먼 흙을 한아름 안고 있는 것 같아서 청결하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런데 백합은 크면서도 겉모습이 깔끔하고 또 세상의 어느 조미료가 따라갈 수 없는 쌈박하고 개운하면서도 개미있는 맛을 지녔다. 그리고 서남해안에서 나는 거의 모든 조개류가 석유냄새가 진동하는데 비해 백합은 죽으면 죽었지 바닷물에 떠 다니는 기름 한 방울 결코 입에 대는 일이 없다.
우리나라의 가장 으뜸인 토종조개, 백합
백합은 껍질이 연한 밤색인데 니스칠을 한 것처럼 반들반들하고 군데 군데 연분홍 점무늬를 띄고 있다. 백합 껍질만 한 쪽 그대로 책상 위에 올려 놓아도 좋은 장식이 될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나는 조개 가운데 껍질이 가장 예쁘다고 할 수 있다. 맛도 조미료를 치면 오히려 훼손당할 정도이니 전복이 어떻고 해삼이 별 것이고들 하지만 내가 보기엔 백합이야말로 우리나라 토종 조개 가운데 맛으로 보나 크기로 보나 자태로 보나 으뜸이기에 충분하다.
백합은 뻘이 적당히 섞인 모래밭에서 산다. 그래서 갯벌이 전혀 없는 동남해안이나 갯벌만 있는 서해안 남부 보다는 전라북도 이북, 충청남도 이남 중부 서해안 바닷가에 많다. 부안에 가면 백합죽 백합회 백합탕을 특산별미로 내놓는다. 예전에 전북 해안에서 백합이 많이 나기로 유명한 곳이 고창군 상하면 자룡리 고리포였다. 고리포에 들어서면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물 먹어 단단한 모래밭 한 쪽에서 갈퀴 같은 것을 찍찍 끌고 다니는 서너명의 아낙네들, 모래밭에 허옇게 깔린 조개 껍질을 볼 수 있다.
고리포에서 만나는 '백합의 영광'
고리포는 웬만한 지도에는 나와있지도 않은 매우 작은 갯마을이지만 얼마전까지만 해도 백합 바지락 굴 맛조개 등 조개류가 풍요롭게 나서 한 번 나가면 몇 바구니씩 캐곤 했다. 또 민물 뱀장어의 새끼인 실뱀장어(갯마을에서는 이를 '히라시'라고 부른다.) 잡이로 톡톡히 수지를 맟추곤 했는데, 겨울철 두 달간 4천만원을 버는 집도 있었다고 한다. 그것은 영광원자력발전소가 서기 전인 80년대 이전의 일이다.
그런데 영광원자력발전소가 들어서면서부터 고리포 '백합의 영광'이 좀 쇠퇴했다. 고리포는 고창의 맨 아랫 갯마을로 전남 영광과 코를 맞대고 있다. 영광과 코를 맞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영광 원자력발전소와 코를 맞대고 있다. 영광에서도 고창의 고리포 만큼 원자력발전소에 가까운 갯마을은 없다. 행정구역으로만 다른 군(郡)일 뿐이다. 그런데 영광 원자력발전소를 지으면서 먹섬에서 육지까지 제방을 막아버렸다. 그 결과 물흐름의 세기와 방향이 바뀌면서 고리포는 모래와 갯펄사태가 났다. 뱃길이 막혀버려서 배들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도 없게 됐다. 발전소 물구멍에 굴껍질이 붙는 것을 막기 위해 약품처리를 하면서부터는 백합이 떼로 죽어서 그 껍질이 모래밭을 뒤덮게 됐다.
예전보다는 못하지만 고리포 사람들의 '백합 살리기' 노력으로 이제 고리포의 백합은 명맥을 유지해 가고 있을 정도이다. 고리포 사람들은 백합 종패를 사다 뿌리고 잡는 백합캐는 양을 한정하거나 해걸이로 캐는 방식으로 백합을 보호해 왔다.
은어떼처럼 반짝이는 물빛, 구시포
고리포에서 차로 10분 거리에 구시포가 있다. 구시포는 해수욕장으로 유명하다. 구시포 역시 고창군 상하면 자룡리에 있다. 구시포해수욕장은 길이 약 1.7km, 폭 2m의 백사장이다. 가슴 벅찬 수평선, 은은한 파스텔 톤의 고운 모래밭, 눈앞에 외로이 떠있는 이름 모를 섬, 은어 떼처럼 반짝이는 물빛이 구시포의 인상이다. 바닷물에 젖은 모래밭은 축구라도 할 수 있을 정도로 단단한 운동장으로 변신한다. 바닷가에는 아늑한 소나무 숲이 둘러서 있다. 해수욕장 앞에는 가막도가 떠있다. 또 백사장 남쪽 기슭에는 천연동굴이 자리하고 있다.
최근 왠만한 바닷가엔 사시사철 여행객들이 찾아든다. 고리포와 구시포에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이런 바닷가를 '철없는 바다'라고 한다. 고시포-영광 원자력발전소-구시포 코스는 한적한 바닷가와 웅장한 초현대 문명의 이기가 공존하는 파격의 미학이 지배하는 해변이다. 고리포나 구시포 해안 식당에서 개운하기 그지없는 백합죽이나 백합탕 한 그릇, 그리고 쌈박한 백합무침 한 접시를 먹어보는 것만으로도 고리포여정은 즐거움으로 채우진다.
/여행전문프리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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