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 부채의 본고장 명성·가업 잇기 "한지의 멋·고풍을 담아내죠"
옛부터 우리 조상들은 단오가 가까워오면 친지나 웃어른들께 부채를 선물하는 풍습이 있었다. '단오진선'에서도 전주부채는 으뜸선물이었다.
조선시대 전주감영의 선자청(扇子廳)에서 선자장들이 만든 전주 부채는 임금에게 진상될 정도로 유명했다. 일제시대를 거쳐 이들 선자장은 전주지역에 자리했으며, 이들 후예 가운데 인후동 가재미골의 방춘근(작고, 태극선 기능보유자)은 태극무늬로 선면을 장식한 태극선으로 알려졌다. 큰딸 방화선 씨(52·한국소리문화전당 1층 전시장)가 아버지의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두 남동생과 두 여동생 모두 부채 만드는 일에 매달려야 했던 시절, 호롱불 켜고 작업하면서 부채 숙제(의무할당량)를 마쳐야 했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화선 씨가 초등학생 무렵, 선풍기가 나오면서 부채바람이 시들해지더니 에어콘에 치여서 '돈 되는 일'은 포기해야 했다.
섬세하고 꼼꼼한 덕에 부채살 간격을 균일하게 놓아서 아주 잘한다는 칭찬을 들었던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오로지 부채만드는 일이요, 가장 자신있는 일도 부채 만드는 일이기에 결혼하고나서 생활이 어려울 때도 부채부터 손이 갔다.
어렸을 때는 하기 싫었던 이 일을, 대나무 살 뜯느라고 어머니 앞니가 반절만 남았을 정도로 고달팠던 이 일을 그는 이왕 들어선 이 길에서 '최고'를 고집하고 있다. 아버지가 만드셨던 부채 모양이 문득 떠오르면서 아버지가 쓰시던 배접을 허겁지겁 찾고, 어머니가 초록색 남색 흰색 그리고 빨간색 양단 천조각으로 그 배합했던 태극선을 떠올리며 단청부채 채색을 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부채는 형태에 따라 넓은 나뭇잎 모양을 그대로 사용한 방구부채(둥근부채)와 휴대하기 편한 쥘부채(접부채)로 나누고, 선면모양, 재료, 크기, 칠의 종류에 따라 다양한 이름을 가졌다. 방구부채는 부챗살에 갑사나 비단 또는 종이를 붙여 만든 둥근형의 부채이며, 접부채는 접었다 폈다 할 수 있게 부챗살에 종이를 붙여 만든 것을 말한다.
합죽선(접부채)보다 만들기 어렵다는 단선부채를, 요즘은 기계로 대량을 생산해내는 태극선에서 그는 최고의 장인을 꿈꾼다. 부채 손잡이를 위해 지금도 충청남도 공주의 얼레선생(얼레빗을 만드는)에게 배우러 다닌다.
수십년 세월동안 그가 마음에 두는 작품은 딱 두점. 곡두선(활을 휘어서 만든)과 돌가루(채화)에 옻칠을 입힌 '고풍스런' 단선부채다. 신어서 편한 신발, 맘에 맞는 옷이 있듯이 작품도 다 작품이 아니라는 그는, 만들어서 앵기는 부채를 만들어야 한다고 믿는다. 옛것 재현이 그의 목표.
한지의 '부풀리기 맛'을 내려고 한지를 일일이 손으로 찢어서 3태극을 만들며 그 품격을 느낀다. 생들기름을 먹인 부채에서 시간이 흐를수록 바랜 멋이 고풍스러운 맛을 낸다고 생각한다.
그는 부채의 본고장인 전주에서조차 요즘 단선부채를 배우는 사람이 없는 점을 안타깝게 여긴다. 대나무를 붙여서 만드는 접부채는 일본이나 중국에 따라가지 못한다고 그는 단정한다. 닥나무가 있었고 한지가 있었던 전주에서 팔을 움직이지 못하는 그 때까지는 자신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인 부채 만들기에 열중하고 싶다는 것이 그의 유일한 소망이다.
저작권자 © 전북일보 인터넷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아래 경우에는 고지 없이 삭제하겠습니다.
·음란 및 청소년 유해 정보 ·개인정보 ·명예훼손 소지가 있는 댓글 ·같은(또는 일부만 다르게 쓴) 글 2회 이상의 댓글 · 차별(비하)하는 단어를 사용하거나 내용의 댓글 ·기타 관련 법률 및 법령에 어긋나는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