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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강암 선생의 위대함 재발견

서거 10주기 '강암 송성용 시문'·'강암 송성용 행장' 출간

어려운 시대를 살면서도 철저하게 전통에 바탕을 두고 붓을 들어온 선비 서예가. 5체에 능하고 다양한 장르의 문인화까지 격 높게 그려낸 강암 송성용 선생(1913~1999)이 세상을 떠난 지 10년이다. 그 사이 한국 화단은 많이 변화했지만, 강암 선생의 정신과 '강암체'는 푸르게 살아있다.

 

강암 서거 10주기를 맞아 「강암 송성용 시문」(미술문화원)과 「강암 송성용 행장」(미술문화원)이 출간됐다.

 

강암 송성용선생 존영(사진 위). 1933년 시문 원문. ([email protected])

 

시문은 강암이 종외조인 김병기 전북대 교수가 우리말로 번역했으며, 행장은 강암의 맏아들인 송하철 강암서예학술재단 이사장이 정리했다. 「강암송성용서집」 「강암천자문서」 「강암묵적」 등 강암과 관련돼 이미 세상에 나온 것들이 강암의 예술세계에 초점을 맞춘 것이었다면, 이 두 권의 책은 강암 선생의 삶과 정신, 생각들을 이해할 수 있는 자료로 주목을 모으고 있다.

 

특히 시(詩)나 기(記), 묘갈명(墓碣銘), 편지 등 강암이 남긴 시문을 본격적으로 번역한 것은 이번이 첫 시도로 그 가치를 더하고 있다. 강암 선생은 지인들에게 편지를 보낼 때에도 그냥 보내지 않고 반드시 한 부를 베껴서 자신이 보관하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김교수는 "사람들은 흔히 강암의 성공을 그의 작품에서 찾지만, 강암의 위대함은 작품도 작품이지만 작품에 앞서 선생의 생활 속에 있었다고 말하고 싶다"며 "선생은 전통적인 방식으로 시문을 남겼지만, 가능한 많은 사람들이 접할 수 있도록 번역은 현대적으로 했다"고 전했다.

 

강암에게 있어 예술과 생활은 다르지 않았다. 강암 선생은 최고의 경지에 이른 인품을 갖출 때 비로소 최고 경지의 예술이 창작된다는 것을 깊이 인식하고 평생을 군자로 살기 위해 노력해 왔다.

 

"일제에 대한 항거로 해 온 보발을 굳이 하루아침에 버려야 할 이유가 없다"며 해방 후에도 두발과 의복을 바꾸지 않았던 선생이 친구들이 장난으로 상투를 잘라버리자 다시 머리가 길 때까지 대문 밖으로 나가지 않았던 것은 이미 유명한 일화. 예술에 있어서는 언제나 겸손해 영운 김용진 선생에게 보낸 편지에는 "저 성용은 먼 시골구석에 사는 까닭에 견문이 매우 좁아서 이른바 먹을 가지고 장난치는 고루한 수준을 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고 적고 있으며, 이름을 널리 알린 뒤에도 검소한 생활을 하며 철저하게 자기 관리를 했다.

 

"저는 부모님 잘 모시고 있으니 다행입니다. 그러나 몸의 병이 아직 떨어져 나가지 않은데다가 일상의 잡다한 일로 인해 시간과 노력을 빼앗기고 있습니다. 책을 읽을 수 있는 날이라고는 한달에 5~6일밖에 되지 않습니다. 접때 형과 함께 책상을 나란히 하고 공부하던 때가 너무나 좋은 시절이었습니다. 제 처지로 인하여 내일은 오늘보다 더 공부할 수 없게 된다면 저는 필경 소인배로 전락하고 말 것입니다."

 

공부에 대한 강암의 강한 의지와 열정 역시 시문 곳곳에 나타나 있다.

 

27일 오후 2시 전북예술회관에서는 강암 10주기 추모제가 열린다. 「강암 송성용 시문」과 「강암 송성용 행장」 발간과 관련해 김교수의 특강이 마련되며, 선생의 제자들로 구성된 강암연묵회의 전시도 이날 개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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