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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재발견 현장답사] ①임진왜란 호남방어와 그 전적지

병력·물자 지속적인 보급으로 임란 극복의 중추적 역할...호국정신의 산 교육장 '웅치 전적지'등 답사

저곡산성에서 내려다 본 천내강 ([email protected])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는 오랜 시간 켜켜이 쌓인 우리의 이야기가 살아있습니다.

 

전북일보가 전주문화사랑회와 함께 전주의 역사와 문화를 직접 보고 느낄 수 있는 '전주재발견 현장답사'를 떠납니다.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길잡이로 나서는 지역 중심의 역사기행. 우리지역 문화유산을 돌아보는 동안 잊고지냈던 우리 역사가 되살아나며 지역 문화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고 우리 고장에 대한 자긍심 또한 높아집니다.

 

사진위부터 이치 전적지, 고경명선생순절유허비, 웅치 전적비 ([email protected])

 

답사는 3월부터 11월까지 전주 중심의 정기답사와 전북권 기획답사가 번갈아가며 이어집니다. 답사가 있는 매월 둘째·넷째주 목요일에는 전북일보를 통해 답사 코스에 대한 정보도 미리 알 수 있습니다.

 

바람이 많이 따뜻해 졌습니다. 전주를 새로운 눈으로 바라볼 수 있는 이 흥미로운 여행에 전북일보, 전주문화사랑회와 함께 동행하시는 건 어떨까요.

 

28일 진행될 2009년도 첫 번째 기획답사의 주제는 '임진왜란 호남방어와 그 전적지'이다.

 

임진왜란 극복에 있어서 호남이 주역이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호남이 임란 극복의 중추적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임란 5년 동안 전라도가 왜군의 수중에 들어가지 않고 방어되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왜군의 호남공격은 개전 직후 조선이 일방적으로 밀리면서 한양이 점령당하고 곧이어 조선 7도가 적의 수중에 들어가는 등 참담한 상황이 전개되던 1592년 6월부터 시작되었다. 이에 대하여 호남의 관군과 의병은 9월까지 3개월에 걸쳐 일련의 치열한 접전을 벌이며 호남을 지켜냈던 것이다.

 

호남으로 침공하는 왜군은 충청도 영동의 황간 순양을 거쳐 1592년 6월 22일 제원 천내강의 저곡나루로 금산성을 공격하여 왔다. 금산은 1963년 충청남도로 행정구역이 편입되기 전에는 역사적으로 전라도에 속한 중요한 군현이었다. 금산군수 권종은 저곡산성을 의지하여 왜군과 전투을 벌였으나 전사하고, 이어서 6월 23일 금산성이 함락되었다.

 

금산을 점령한 왜군은 이곳을 근거지로 하여 6월 말 용담과 진안을 거쳐 전주로 공격해왔다. 마침내 7월 8일 진안에서 전주로 오는 길목인 웅치(곰티재) 일대에서 의병장 황박, 나주판관 이복남, 김제군수 정담 등이 이끄는 관군과 의병은 호남을 지키기 위한 혈투를 전개하였다. 그날 저녁 무렵 김제군수 정담이 전사하고 웅치가 적의 수중에 넘어갔지만, 이 전투에서 호남 수비군의 사투로 왜군의 전력을 크게 약화시켜 호남방어의 결정적 계기를 만들었다. 웅치전투의 현장은 웅치를 경계로 한 진안군과 완주군 일대에 걸치고 있는데, 현재 완주군 소양면 신촌리 지역만이 전라북도 기념물 제25호로 지정되었고, 신촌리 부근 곰티재 정상에는 웅치전적비가 세워져 있다.

 

웅치를 넘은 왜군은 전주 안덕원 부근까지 침입해 들어와 웅치에서 싸우다 퇴각한 나주판관 이복남, 의병장 황박의 군사와 대치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웅치를 넘는 과정에서 호남수비군의 사투에 의하여 전력이 크게 약화된 상태였으며, 전주부성에서는 전라감사 이광과 전전적 이정란이 수비태세를 강화하고 있어서 전주부성을 공격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7월 10일 전라감사 이광의 명령에 따라 남원에서 이동해 온 동복현감 황진이 안덕원 너머 소양평에서 이들을 물리침으로서 전주가 지켜지고 전라도가 극도의 위기상황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한편 5월 말 담양 회맹에서 의병장으로 추대된 고경명은 호남의병을 이끌고 북상하다가 왜군의 금산성 침공 소식을 듣고 이를 치기 위해 진산으로 진로를 변경하였다. 고경명은 7월 9일부터 금산성을 공격하다가 다음날인 10일 왜군의 공격을 받아 패배하고 고경명 등 많은 의병이 순절하였다.

 

웅치전투 이후 호남 여러 군현에서 동원된 관군과 의병이 금산성으로 퇴각한 왜군을 대대적으로 공격하고자 금산 주위에 주둔하며 공방전을 벌이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금산의 왜군은 동복현감 황진과 광주목사 권율이 지키고 있던 이치를 향하여 공격하여 왔다. 이치전투가 벌어졌던 시기는 정확히 전해오지 않으나 7월 20일 이후로 추정되는데, 오희문의 쇄미록에는 8월 17일에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싸움에서 황진의 분전과 권율의 독전으로 왜군을 물리치고 호남을 지키는 또 하나의 계기를 만들었다.

 

이어서 이치전투에서 패퇴하고 금산성으로 철수한 왜군을 충청도 옥천에서 의병을 일으킨 조헌이 칠백의사를 거느리고 승병 천여명을 거느린 영규대사와 함께 8월 17일 금산성을 공격하여 왜군과 결전을 벌이다가 8월 18일 금산 북쪽 연곤평에서 모두 순절하였다. 조헌 순절 후 해남현감 변응정이 8월 27일 금산성을 공격하다가 횡당촌에서 순절하였다고 하는데 이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호남이 금산성에 주둔한 왜군의 공격을 막아내며 3개월을 버티면서 9월로 접어들자, 초기의 극도 불리했던 전황이 서서히 조선에 유리하게 변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왜군은 병력을 점차 경상도로 철수하여 전선을 축소하였고, 이 과정에서 금산에 들어온 왜군도 9월 17일 경상도로 철수하게 됨으로써 호남은 왜군의 직접적인 공격의 칼날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이와 같이 호남방어는 어느 특정의 전투나 특정 인물 한사람의 힘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왜군의 침공 앞에 자신과 국가를 지키려는 호남인들의 피의 대가로 이루어진 위대한 결과였다. 이렇게 호남방어는 임란 초기의 불리한 전황극복의 계기를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이후 호남으로부터 병력과 물자가 지속적으로 보급되어 임란극복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에 호남이 없으면 국가도 없다(若無湖南 是無國家)'라는 이순신 장군의 말도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이번 답사는 임진왜란 초기 호남인들이 침공하는 일본의 육군의 공격에 맞서 목숨을 바쳐 싸워 고장을 지키고, 나아가 임란극복의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하였던 호남방어의 현장을 돌아보는 것이다. 답사 일정은 진행 편의상 안덕원과 세마천, 웅치전적지 등 전주 완주 지역의 전적지를 거쳐, 충남 금산의 제원 닥실나루로 이동하여 천내강변의 개티싸움터와 저곡산성을 답사하고, 금산읍으로 들어와서 칠백의총과 고경명 순절지를 둘러보고, 다시 전주로 향하여 대둔산 기슭의 이치전적지를 거쳐 돌아오는 순서로 진행될 예정이다.

 

이번 답사를 통하여 우리의 선조들이 왜적의 위협에 불굴의 의지로 사투를 전개하여 지역을 지키고 나아가 국가를 구하였던 호남지역의 역사를 올바로 이해하고, 오늘의 어려운 상황에 적극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건전한 자긍심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하태규(전북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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