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트랑 베르즐리지음·성귀수 옮김·개마고원·2007>'카르페 디엠'을 아십니까?
"카르페 디엠(carpe diem)!" 삶을 즐기라는 뜻의 라틴어다. 강금실씨의 인생 좌우명으로 소개돼 유명해진 말이기도 하다. 평소 그녀는 "사회적 삶에 대한 집착이 없다"는 말을 해왔다. 속물적인 출세·권력 욕망이 없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실제로 그녀는 그런 태도를 보여왔다. 지난 총선에서 큰 역할을 했으면서도 막상 자신은 출마하지 않은 걸 두고 '강금실의 한계'라고 말하는 이들이 많았지만, '카르페 디엠'의 관점에서 말하자면 백번 천번 잘 한 거다. 보통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정치의 마력이 있긴 있겠지만, 그게 무엇이건 삶을 즐기는 데엔 별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얼마전 서울대 법대 조국 교수가 낸 칼럼집 「성찰하는 진보」를 읽다가 '카르페 디엠'이 또 나오는 걸 보고 흥미로웠다. 이런 이야기다. "2005년에는 개인 홈페이지를 개설하면서 오랫동안 컴퓨터 속에 잠자고 있던 조각글과 사진 파일을 정리해 공개했고, 이후 순간순간 떠오르는 상념도 계속 홈페이지에 올려놓았다. 내 나름의 '카르페 디엠'이었다." 그렇다. '카르페 디엠'은 뭘 큰 걸 즐기라는 게 아니다. 오히려 일상의 소소한 것들을 더 소중히 여긴다.
프랑스 철학자 베르트랑 베르줄리(Bertrand Vergely)가 쓴 「행복생각」(성귀수 옮김, 개마고원, 2007)을 읽다가 또 '카르페 디엠'을 마주쳤다. 그는 '카르페 디엠'의 두 얼굴에 주목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순간을 산다는 것이 인생을 모아두기 위해 전전긍긍할 게 아니라 현재를 충실히 살자는 뜻이라면, '카르페 디엠' 좋다! 기꺼이 순간을 붙잡자! 삶을 향한 조건 없는 긍정을 통해서 얻어진 해방감을 얼마든지 만끽하는 거다. 그러나 '카르페 디엠'이 어린 시절이나 사춘기적 열기 속에 멋모르고 뛰어드는 위험천만한 혼돈을 의미한다면, 미안하지만 아니올시다이다! 퇴행은 아니라는 얘기, 설탕처럼 달콤한 세계로의 회귀는 아니라는 얘기다."(15쪽)
삶을 즐기되 언제 어떻게 즐기느냐가 문제라는 말이렸다. 가장 중요한 건 타이밍이다. 인생을 즐기는 데에 있어선 '알맞은 때'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그러고보니 '행복'이란 단어의 라틴어가 '보나 오라(bona hora)'라는 점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보나오라'는 '알맞은 시간'이란 뜻이기 때문이다.
"아이는 일찍 낳는 게 좋다." 어른들은 늘 이렇게 말하곤 했다. 그 말을 내심 낡아빠진 생각으로 무시한 젊은이들이 적지 않았으리라. 이들이 나이를 먹으면 알게 된다. 자녀교육의 부담 때문에 인생을 즐기고 싶어도 즐길 수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되면 어른들의 그 귀신 같은 지혜에 뒤늦게 탄복하게 된다.
"오 찰나여, 멈추어다오, 너는 그토록 아름다우나니." 독일 시인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1832)의 절규다. 그 찰나가 행복감이 잔뜩 무르익은 찰나라면 그 어찌 허망하게 떠나보낼 수 있을소냐. 그래서 사람들은 사진을 열심히 찍어대는 건지도 모른다. 베르줄리는 인상파 화가들은 유일한 순간들의 잊을 수 없는 본질을 효과적으로 살려낼 줄 알았다며, 그들에게서 행복의 문법을 배울 걸 권한다.
"어느 여름 오후, 마른 강변의 유원지는 영원의 순간을 경험하게 해줄 좋은 장소가 될 수 있다. 우연히 발견한 어느 매혹적인 레스토랑이랄지, 비 내리는 정원, 막다른 골목길의 어느 외딴 카페의 무심코 지나는 순간으로부터 이탈된 몇몇 순간을 음미하는 일이 그 누구에겐들 일어나지 않겠는가? 행복이란 피부에 닿을 듯 말 듯 느껴지는 무엇이다. 그것은 시간에 닿을 듯 말 듯 스쳐 지나간다. 이 점에서도 고대인들의 좌우명은 여전히 타당하다. 카르페 디엠.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시간(日)을 따라', 즉 '순간을 붙잡아라'라는 말이다. 그러니 이제부터 무조건 살아라. 절대 기다리지 말라."(282~283쪽)
만약 우리 모두가 이런 '카르페 디엠'의 원리를 따른다면, 세가지가 좋아진다. 세계적으로 하위권에 속해 있는 우리 국민의 행복감이 높아질 것이고, 목숨 걸고 싸우는 입시전쟁이 완화될 것이고, 공직자들의 부정부패가 감소할 것이다. 이 세 번째 부정부패가 중요하다. 우리는 부정부패가 더러운 것처럼 말하지만, 그걸 저지르는 사람들은 대부분 가족을 끔찍하게 아끼는 사람들이다. 내 새끼 잘 되게만 할 수 있다면, 이 한몸 버리는 것도 마다 않겠다는 지극한 부성애거나 모성애의 주인공들인 것이다.
물론 우리는 '카르페 디엠'의 실천이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걸 잘 안다. 모두 동시에 다 그렇게 한다면 해볼 수도 있겠지만, 자신만 그렇게 했다간 큰 손해를 보거나 망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리라. 이른바 '죄수의 딜레마'의 고난도 버전인 셈이다. 그래서 우리는 '카르페 디엠'을 사실상 외면하거나 경멸하면서 살아간다.
그렇지만 은밀하게 시도하는 나름의 '카르페 디엠'은 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나름의 '설탕처럼 달콤한 세계'를 감춰두고 있는 것이다. 그게 무언가? 가장 대표적인 게 불륜(不倫)이다. 한국은 세계에서 내로라 하는 '불륜의 천국'이다. 일부 한국인들은 일본 여자들이 헤프다고 주장하는데, 한국에서 살다간 일본 여자들이 낸 책들을 보면 한결같이 "한국의 개방된 성(性) 문화에 깜짝 놀랐다"는 증언들이 담겨 있다.
각종 조사 결과도 그런 증언을 뒷받침해준다. 1991년 심영희 교수(한양대 사회학)가 서울지역 남녀 1200명을 상대로 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남성의 20%가 한 번 이상 간통한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2006년 한국일보 기획취재팀이 여성포털 '젝시인러브'(xyinlove.co.kr)와 공동으로 기혼 여성 대상의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응답자 194명 중 '직접 외도를 했다'(56명) 또는 '외도 문제로 고민했다'(36명)는 여성이 92명으로 전체의 절반(48%)에 육박했다. 특히 외도 경험이 없는 여성 중에서도 '주변에서 외도를 본적이 있다'는 응답자는 61명(31%)에 이르는 반면, '외도를 본적이 없다'는 응답은 22명(11%)에 불과했다. DNA검사 업체에도 친자여부를 확인하려는 고객들의 주문이 쇄도했으며, 한 대형업체의 경우 아버지와 자녀의 DNA가 일치하지 않는 비율이 2001년 10%(10건)에서 2005년엔 20%에 달했다.
올 1월 경찰에 걸려든 '불륜 공무원' 협박 사건은 어떤가. 범인들은 공무원들에게 무작위로 전화를 걸어 "당신이 여자와 모텔에 들어가는 장면의 사진을 많이 갖고 있다. 1000만원을 송금하지 않으면 그 자료를 직장과 가정에 알려 망신을 주겠다."고 공갈 협박했다. 이에 제발이 저린 14명의 공직자들이 한 사람당 130만~800만원씩 모두 4000여만원을 송금했다는 것이다. 이런 유형의 협박 사건은 매년 몇 차례씩 일어나는데, 놀라운 건 아무런 정보도 없이 아무에게나 전화를 걸어 협박을 해도 꼭 돈을 보내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이다.
한국의 놀라운 불륜 문화는 한국인 특유의 개척정신과 진취성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자위해야 할까? 혹 이게 일상의 소소한 '카르페 디엠'을 하지 못해 생겨난 현상은 아닐까? 「행복생각」을 읽으면서 내내 해본 생각이다.
/강준만 교수(전북대 신문방송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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