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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재발견 현장답사] ⑦호남 선비문화의 역사

조선 대표 우리고장 선비들…넓고 큰 학덕, 매화 향 그윽

(위)정읍 필보면 무성서원. (아래 왼쪽부터)전남 장성 필암서원·김제민 오봉선생전집 일부. ([email protected])

경상도에서는 안동과 선산을 중심으로 서원의 설립과 더불어 걸출한 학자들이 많이 배출되었다면, 전라도에서는 태인·고부·담양·장성 지역을 중심으로 학문의 꽃을 피우게 되었으며 일재 이항·익재 이희맹·하서 김인후·면앙정 송순·고봉 기대승·송강 정철·오봉 김제민·노사 기정진·목산 이기경·간재 전우 등 걸출한 학자를 배출하며 호남 사림이 형성되었다.

 

'호남 선비문화의 역사'라는 주제로 펼쳐지는 이번 전주재발견 현장답사는 무성서원, 도계서원, 필암서원으로 이어지는 서원 답사를 통해 우리 고장의 빛난 얼을 계승하고 삶의 표양이 되었던 선현들의 정신을 이어 받는 계기가 되는 한편, 예나 지금이나 교육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느끼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 최치원 선생 모신 무성서원

 

옛부터 호남지방 선비들은 칠보면에 있는 유상대 터에 위치한 선현사라는 사당에서 우리나라 문장과 유학의 비조로 일컫는 고은 최치원의 위패를 모시고 제향을 올리곤 하였다. 그러던 것이 조선 성종 15년(1544) 선현사를 무성서원 뒤편에 위치한 태산사로 옮기고 최치원과 신잠을 모시게 되었다. 현재의 무성서원은 숙종 22년(1696) 나라로부터 사액을 받아 최치원·신잠 이외에 정극인·송세림·정언충·김약묵·김관을 모셨다.

 

현재의 건물은 현종 10년(1844)에 중수한 것이며, 명륜당은 순조 25년(1825)에 불탄 것을 1828년에 중건한 것이다. 최치원을 모신 서원이었기에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훼손이 되지 않은 전국 26개 서원(사당 포함 47개소) 가운데 하나이며, 전라도 지역에서는 오로지 이 무성서원과 필암서원만은 없애지 못하였다.

 

무성서원은 을사늑약 체결 후 1906년(병오년) 면암 최익현이 73세 나이로 항일투사 임병찬과 더불어 1000여명의 호남 의병을 모아 일제에 투쟁하기 위해 궐기한 터이기도 하다.

 

▲ 충신 기리는 도계서원

 

도계서원(道溪書院)은 1673년 김창집·민진원의 건의로 정읍시 덕천면 도계리 464번지에 창건, 이희맹·김제민·최안·김지수 4분을 향사하다가 숙종 23년(1697) 김제안을 헌종 6년(1840)에 김흔을 추배했다.

 

 

이 중 이희맹(1475~1516, 자 백순, 호 익재)은 7세에 경서를 통달하고 성종 20년이 되던 해 15세의 나이로 향시에 일등으로 합격, 그 해 가을에 열린 문과 급제를 거쳐 홍문관 수찬에 오른 소년 천재이자 연산군의 난정(亂政)에 벼슬을 버리고 초야에 은거한 절의의 선비이다.

 

또한 충강공 김제민(1527~1599, 자 사료, 호 오봉)은 내외 요직을 두루 거친 뒤 고향에 돌아와 자연을 벗삼고 풍류를 즐기며 후학을 양성하던 중 임진왜란을 맞아 66세의 노구임에도 불구하고 임금을 향하여 북향사배하고 분연히 자제들을 이끌고 의병으로 나선 충절의 선비이다.

 

왜적을 피해 몽진하는 임금을 보필하고자 북으로 가던 중 적의 무리가 웅치를 거쳐 전주성을 공격하고자 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김제군수 정담과 함께 웅치전투에 합류, 웅치 중턱 험한 곳에 목책을 치고 온 종일 몸소 북채를 들고 장병들을 독려, 다섯 번을 몰아내고 다섯 번을 밀리는 힘겨운 전투 끝에 적의 예봉을 꺾은 전과와 더불어 장성 남문에 의병청을 세우고 의병을 일으켜 충청도 직산 진위에서 왜병을 무찌르는 등 문무를 두루 겸비한 선비였다.

 

이후 고종 5년(1868)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62년 4월 18일 중건하여 김섬·김습을 추가로 배향하는 한편 1995년도에는 유물관을 세워 충절의 산교육장으로서 역할을 다하고 있다.

 

▲ 필암서원과 하서 김인후

 

16세기 조선을 대표하는 유학자이자 문묘에 배향된 18현 가운데 유일한 호남지방 선비인 하서 김인후(1510~1560)를 모신 필암서원(筆巖書院)은 앞에서 언급한 무성서원과 더불어 전라도에서 훼철을 면한 서원이자 현재까지도 옛 규모를 그대로 간직한 곳으로 사당 동쪽 경장각에는 인종이 직접 하사했다는 묵죽도와 더불어 하서유묵 등 60여 점이, 장판각에는 하서집의 목판각을 비롯한 각종 판각 700여점이 보관되어 있는 곳이다.

 

'조선 중엽 호남 북쪽에는 이항, 남쪽에는 김인후, 영남에는 이황, 충청에는 조식, 서울에는 이이가 버티고 있었다'는 역사서에서 보이듯이 그의 학덕은 크고 넓었으며, 율곡 이이조차도 '청수부용 광풍제월'(淸水芙蓉 光風霽月·맑은 물에 뜬 연꽃이요 화창한 봄바람에 비 온 뒤의 맑은 달)이라고 할 정도로 호남 유학사에서 독보적인 존재였다.

 

서슬 퍼런 임금의 폭정과 거듭되는 사화를 피해 고향에 내려와 살면서 학문에 대한 깊은 성찰과 함께 자연과 풍류를 노래한 1,600수에 이르는 시를 남긴 아울러 집안 다스리기를 나라 다스리듯 했던 철저한 선비 하서 김인후. 그의 학문이 조선시대 당대에 어떻게 평가되었는지는 동국십팔현(東國十八賢) 중 한 명으로 문묘에 배향된 점에서 단적으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유종국(전북과학대학 교수)

 

 

※ 이번 답사는 '호남 선비문화의 역사'(안내 유종국 전북과학대학 교수) 27일 오전 9시 전주역사박물관 출발

 

  무성서원→도계서원→필암서원

 

※ 다음 답사는 7월 11일 '전주에 뿌려진 천주교인의 성혈'(안내 서종태 호남교회사연구소 실장)

 

※ 답사신청은 전주문화사랑회(www.okjeonj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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