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한나도(이리중 교사)
학창시절 나는 착하다는 칭찬을 자주 받았다. 선생님들과 집안 어른들뿐만 아니라 친구들에게서도 들은 찬사이다. 어릴 때는 듣기 좋은 말이었으나 나중에는 마냥 흐뭇하지만은 않았다. 주변사람에게 인정받으려는 의도로 선행을 한 것은 아닌데, 그런 말을 자꾸 듣다보니 오히려 주변의 시선이 의식되어 착함이 하나의 굴레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뭔가를 할 때 착함을 기준으로 자기검열을 하는 내 모습은 영락없는 모범생의 모습이었다. 성인이 되면서 모범생의 모습은 감추고 싶은 비밀이 되었다. 사람들에게 남겨진 내 과거의 모습에 부응하며 생활하기가 답답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착하다'라는 말은 마치 당근과 같아서 타인에 대한 순종을 이끌기 손쉬운 방법인 것 같다. 물론, 칭찬하는 사람들이 처음부터 그런 의도로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착하다'는 칭찬을 계속해서 듣는 사람들은 어느새 착함을 내면화하게 되어 자신의 욕망을 억누르는 기제를 만들게 되고 결국 '착한 여자·딸·아이 콤플렉스'를 만들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나보다 힘없는 학생들이나 아이에게 착함의 굴레를 씌우지 않기 위해서 '착하다'라는 말은 되도록 하지 않는다. 대신 구체적인 행동에 대해서 칭찬을 한다. 성실하구나, 겸손하구나, 유머가 있구나, 책임감이 있구나, 친절하구나, 이해심이 많구나 등등.
한편으로 나 자신이 착함의 굴레에 빠지지 않기 위해 자신에게 잘못의 화살을 돌리며 '미안하다'라는 말을 남발하지는 않는다. 객관적으로 미안한 상황에서는 학생들에게도 당연히 사죄한다. 그러나 내 언행이 사회적 관습에 어긋났다는 이유만으로 미안해하지는 않는다. 일례로, 놀이방에 있는 아이를 늦게 데리러 갔을 때 나는 아이에게 '엄마가 늦어서 미안해'라고 말하지 않고, "엄마가 늦었는데 참고 기다려줘서 고마워"라고 말한다. 나의 부족함 대신 아이의 대견함을 부각시키는 것이다. 이렇게 여전히 착하다는 말에 과민함을 가지고 있으니 나도 '착한어른(엄마)콤플렉스'를 벗어났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런데 요즘 '착한 몸매'라든가 '착한 가격'처럼 조금은 가볍게 사용되는 '착함'을 보니 나도 이제는 편하게 받아들이고 싶다. 물론 '착한 몸매'는 여성들의 대상화를 일삼는 말이니 불만이 있고 '착한 가격'에 속아 형편없는 상품을 소비하게 된다면 판매자만 좋은 일이니 결코 진짜 '착한' 것은 아니다. 그중 가치있는 착함은 요즘 떠오르는 '착한 상품'이 아닐까. 공정무역(fair trade)을 통해서 거래되는 커피나 초콜릿, 축구공 등이 쉬운 예이다. 또 나눔실천과 기부문화 확산을 위해 사랑의 열매가 전개하는 '착한가게 캠페인'에 동참하는 착한가게들이나 아름다운가게 같은 곳이 있다.
공공의 선을 위해 함께 실천하는 착함은 기쁘게 동참할 의향이 있다. 그러한 착함은 개인의 행동을 사회적 잣대로 옭아매지 않아 마음의 짐을 지우지 않을 뿐더러 선행을 실천하고 있다는 자부심도 주니 일석이조 그 이상이다. 그러고 보니 내가 벗어나고 싶은 '착함'은 인간관계에 길들여져서 나를 잃어버리게 하는 착함, 다시 말해 '순응'의 다른 이름이었던 것 같다.
/정한나도(이리중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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