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리처드 로티 지음, 임옥희 옮김, 동문선, 2003> '강남 좌파' 다시보기
지난 2005년 3월 미국 로버트 리히터 조지메이슨대 교수와 스탠리 로스먼 스미스칼리지 교수 등이 공동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스스로를 진보파라고 밝힌 미국 대학교수의 비율은 무려 72%였다. 보수파는 15%에 불과했다. 정당 소속별 분류에서도 민주당원이 59%, 공화당원이 11%였다.
참으로 이상하지 않은가? 당시 미국사회는 전반적으로 보수화가 정점에 이른 시점이었는데, 교수는 진보파가 압도적으로 많다는 게 말이다.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매우 심각하게 우려해야 할 현상일까? 이게 결코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지식인의 다수는 이명박 정권에 비판적인데, 일반 대중의 시각은 꼭 그렇지만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지식인들이 이 대통령의 지지율 상승에 곤혹스러워 하면서 그 이유에 대해 이렇다 할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이에 대한 답의 실마리나마 얻기 위해선 지난 96년과 2001년 한국을 두 차례 방문하기도 했던 미국 철학자 리처드 로티(Richard Rorty, 1931-2007)의 「미국 만들기 : 20세기 미국에서의 좌파 사상」(임옥희 옮김, 동문선, 2003)을 다시 읽어볼 필요가 있다. 그는 이 책에서 이렇게 주장한다.
"강단에서 좌파는 현실 정치가 문화 정치로 대체되도록 허용했으며, 문화적인 쟁점을 정치적인 논쟁으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우파와 공모해 왔다. 그들은 새로운 법안을 제안하는 방향으로 쏟아야 할 에너지를 (…) 이 나라의 요구와는 너무나 동떨어진 주제에 관해 논쟁하는 데 소모하고 있다. 강단 좌파는 미국에 제안할 계획이 없으며, 특별한 개혁을 하는 데 필요한 합의를 구축함으로써 이룩될 수 있는 나라에 대한 비전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로티가 쓰는 '좌파'라는 용어는 한국처럼 좌우를 막론하고 '좌파 알레르기'가 심한 나라에선 그대로 쓰기가 어렵지만, 뭐 심각하게 생각할 것 없이 그냥 구분을 위한 편의적 2분법에 따른 개혁·진보파로 이해하는 게 좋겠다.
모든 진보파들이 로티의 주장에 동의하는 것도 아니거니와 그를 향한 비판도 만만치 않다. 국내에서도 마찬가지다. 다만 로티의 빼어난 미덕이 있다면 그건 다른 사람들이 엉거주춤하게 대하려는 걸 직시하려는 솔직함이라고나 할까. 이 책을 번역한 임옥희는 "기존 질서를 철저히 인정하는 논리를 들이밀면서 개혁주의 좌파라고 주장하는 로티의 사회적인 무책임에 분개하면서도 그의 지적인 솔직함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했다. 로티가 힘 주어 비판하는 건 이른바 '좌파 순결주의'다. 강단이 순결주의를 지키는 데엔 매우 유리한 곳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당연한 귀결이다. 임옥희의 해설을 들어보자.
"이렇게 하면 프티부르주아 개량주의로, 저렇게 하면 중산층 소시민 의식으로 분류하고 범주화하고 서열화하여 배제를 정당화시켜 온 것이 바로 이 좌파 순결주의였다. 그렇다면 민중만이 오류를 범하지 않는다? 그것은 민중의 순결성을 자신들의 권력 기반으로 삼으려는 좌파 엘리트주의의 가면일 뿐이다. 뿐만 아니라 좌파들은 아직까지도 상품화·물신화·소외와 같은 상투적인 어휘를 남발하면서 자기 틀 안에 갇혀 있다. 이같은 상투적인 어휘는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낼 새로운 이미지와 언어가 아니다. 그것은 화석화된 언어들일 뿐이며, 그런 만큼 그들이 제시하는 미래의 청사진 역시 화석화된 것이다. 아니, 아예 그런 청사진마저 이들에게는 없다는 점이 로티의 공격이다."
임옥희는 "(로티의) 지적인 솔직함과의 대결이 한국 좌파들의 자기 성찰과 반성으로 이어지고, 그로 인해 한국 좌파들의 현실 대응력을 다시 보강하는 기회가 될 수는 없을까라는 점에 생각이 미치게 되었다"는 희망을 피력한다. 맞다. 그리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게 가능할까? 혹 이른바 '시장 논리'의 함정에 빠져있는 건 아닐까? 즉 진보를 지지하는 대중 사이에서 어떤 주장들이 잘 먹히고 잘 팔리느냐 하는 걸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이 시장 논리는 선정적인 저널리즘이나 연예시장의 논리와 다를 게 하나도 없다. 학계는 '근본주의'에 충실하다는 점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
미국은 어떨까? 로티는 "많은 미국인 학생과 교사들 사이에서 미국을 이룩하려는 꿈을 가진 좌파들보다는 오히려 방관적이고 진저리치면서 조롱하는 좌파들이 이제 인기를 얻고 있다"며 다음과 같이 개탄한다.
"이들만이 우리가 가진 유일한 좌파는 아니지만, 그들이 가장 두드러지고 목소리가 큰 좌파들이다. 이런 좌파의 구성원들은 (…) 미국을 용서할 수 없고, 이룩될 수 없는 나라로 간주한다. 이로 인해 그들은 자기 나라로부터 뒤로 물러서게 되고, 그들이 말하는 바대로 자기 나라를 '이론화'한다. (…) 이런 사고로 인해 그들은 희망보다 지식을 선호한다. (…) 미국 좌파가 국가적인 자부심을 갖지 못한 채로 남아 있는 한 미국은 정치적인 좌파가 아니라 단지 문화적인 좌파가 될 뿐이다."
한국에선 '강남 좌파'라는 용어가 널리 쓰이고 있다. 노무현 정부 시절 보수파가 붙인 부정적 의미의 딱지지만, 전혀 근거가 없는 건 아니다. 정치경제적으로나 사회문화적으로 상류층에 속하면서 상류층의 라이프 스타일을 즐기는 사람이 진보적 가치를 역설하는 게 위선이 아니냐는 문제 제기는 오래전부터 있었다. 그러나 어차피 정답은 없는 논쟁이다. '강남 좌파'에 일장일단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몇 년전 '강남 좌파'를 다룬 글에서 '강남 좌파'에 대한 긍정론과 부정론의 이유를 각 3개씩 지적한 바 있다.
우선 긍정론이다. 첫째, 상류층 사람이 진보적 가치를 역설하는 건 하층계급에 큰 힘이 된다. 상류층 사람이 점하고 있는 위치의 파워 덕분이다. 둘째, 갈등의 양극화를 막는 데에 도움이 된다. 모든 상층계급은 보수, 모든 하층계급은 진보라면 갈등이 살벌해지겠지만, 상층에도 진보가 있고 하층에도 보수가 있다는 건 양쪽의 충돌 예방에 도움이 된다. 셋째, 상류층에 속하면서도 하층계급을 생각하는 마음이 고맙다. 그걸 위선으로 보겠다면, 이 세상에 위선 아닌 게 뭐가 있겠는가.
다음은 부정론이다. 첫째, 권력·금력까지 누리면서 양심과 정의의 수호자로 평가받는 이른바 '상징자본'까지 갖겠다는 건 지나치다. 빈털터리라도 세상을 향해 큰소리 치면서 사는 맛이라는 게 있는 법인데, 그런 '도덕적 우월감'까지 상류층이 누린다는 건 부당하다. 둘째, 진보를 보다 많은 권력·금력을 쟁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한다. '강남 좌파'의 진보 프로그램은 하층계급의 절박함을 모르기 때문에 진정성이 결여돼 있으며, 상징적인 제스추어로 끝날 가능성이 높다. 셋째, '강남 좌파'의 진보 프로그램은 말로만 강경한 속성이 있어 실천보다는 당위의 역설로 그칠 가능성이 높고, 오히려 해낼 수 있는 실천마저 어렵게 만들 수 있다.
자, 사정이 이와 같은데 '강남 좌파'를 무조건 긍정하거나 무조건 부정할 수만 있겠는가? 각 인물별, 사안별로 구체적인 평가를 내리는 게 공정한 대응일 것 같다. 문제는 가면 갈수록 진보의 주창자들과 수혜자들의 간격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점에서 '강남 좌파'는 성찰할 점이 있다. 성찰할 뜻도 없고 그게 가능하지도 않다 하더라도, 주목을 요하는 지점인 것은 분명하다.
/강준만(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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