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의 감칠 맛 나는 전통시장
어린 시절 느꼈었던 시장은 먹을거리와 신기한 물건이 많아 신이 날 정도였지만, 사람들이 많아서 엄마의 뒷모습을 놓쳐 길을 잃을까봐 불안하고 시끄러운 공간이었다. 오는 길에는 피곤함에 버스에서 잠을 청하면서도 며칠 지나면 또 가고 싶다며 울고불고했다. 시장에 대한 내 유년시절의 기억이다.
그리고 시간은 흘러 성인이 된 뒤로는 시장보다 백화점과 대형마트에서 식품을 구입하는 일이 많았다.
시장을 지나면서도 다시는 그 공간은 찾지 않을 것처럼 쳐다봤다. 백화점 식품매장을 샅샅이 쇼핑하고 심지어 타지역의 대형마트를 구경하러 가서 식재료를 사올 정도였다. 사실 대형마트는, 식재료는 물론이고 가공식품의 트렌드를 정확히 읽을 수 있는 공간이기도 했다. 다시 말해 대형마트의 식품매장 구경은 하나의 현장 공부였던 것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인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어린 시절에만 좋아했던 시장에 발을 내딛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단호박 하나만 덩그러니 사가지고 왔다가 다음엔 생선도 사보고, 사과도 한 번 사보는 쑥스러운 시도를 했다. 내 돈 내고도 쑥스러운 이유를 생각해보니 서른 살이 넘도록 시장에서 물건을 사본일이 없었던 것이다. 어떤 면에서 보면 창피한 일이다.
그러나 시장에서 장보기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한건 불과 몇 년이 되지 않는다.
오늘 날에는 '시장 구경이 화려한 백화점의 식품매장보다 낫다'는 생각이 들고, 시군의 장날을 수첩에 적어둘 정도가 됐다. 명품 식기보다 옛날 사기 그릇이 좋아지고, 외국 유명 소스보다 우리 청장이 맛내기 비법임을 알아가고 있다.
점점 과거로 눈을 돌리면서 촌스러워지는(?) 나 자신을 생각하며 웃음 지을 때가 있다. 역시나 여행을 해도 촌스럽기 짝이 없어 주말에 일을 보고 오면서 장터에 들렀다.
봄이 되어 나온 씨감자, 파릇파릇한 겨우살이, 그윽한 향의 더덕,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끈한 두부, 그리고 그 공간을 채워주는 사람들을 보면서 이유 없는 친밀감이 생기고 발걸음이 가벼워진다. 역시나 시장은 신기한 보물이 가득한 공간이고, 봄 햇살만큼 따뜻한 공간이다.
대장간에서 직접 만든 작은 과도부터 클리버(중식용 칼)를 보면서 독일의 세계적인 브랜드가 판매하는 세련된 주방용 칼보다 대장간에서 두드려 만든 둔탁하고 까만 칼을 세트로 구입하고 싶다는 충동도 생겼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내 눈엔 역시나 음식과 관련된 식재료와 식도구뿐이다.
장에 가면 먼저, 장터 국밥으로 배를 채우고 구경을 시작해야하기에 유명한 국밥집에 들어가니 너무도 초라해서 어디에 앉아야할지 몰라 두리번거리게 되었다. 밑반찬 5가지와 함께 나온 국밥은 정말 소박했다. 그리고 솔직히 국밥은 화학조미료를 많이 넣어 냄새도 났고, 간이 세서 물을 부을 정도였으며, 위생적인 면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 와서 '맛있었다'고 말하는 이유는 내가 그곳에서 먹은 것은 짠 국밥 한 그릇이 아니라 손님들을 대하는 주인 아저씨의 편안한 미소와 소담스럽게 담아낸 음식의 넉넉함에 묻어나는 정이였던 것이다. 틀림없이 맛이 없었는데, 맛이 있었다고 말하고 있으니 역시 음식의 맛은 음식 하나만으로 평가 내리기엔 무리가 있다. 어느 호텔 레스토랑의 스테이크보다 장터에서 먹은 오천원짜리 국밥이 내 마음을 따뜻하게 했다.
가까운 우리 지역에 시장도 많지만, 각각의 특색을 가지고 아담한 장도 많이 열린다.
밤늦게까지 영업하고 모든 식재료가 작게 포장되어 있어 언제나 편하게 구매할 수 있는 대형마트의 장점도 있지만, 장이 서는 날만 기다렸다가 천천히 둘러보고 흥정하며 골라 사는 시장의 재미에 비하지는 못할 것이다.
음식에만 패스트푸드, 슬로우 푸드가 있는 것이 아니다. 시장에도 패스트 마켓, 슬로우 마켓이 있다는 말이다.
화려함보다는 소박함이, 인공적인 면보다는 자연스러움이, 복잡함보다는 단순함이, 이익보다는 손해가 '종종' 우리의 마음을 편하게 할 때가 있다. 앞으로는 '종종'이 '언제나'로 바뀌었으면 한다. 생각 없이 빠르기만 한 행동보다 생각 끝에 느린 행동이 더 의미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송영애(푸드코디네이터·전주기전대 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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