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시절 즐겼던 시래기죽·수수떡수제비 어머니 손맛 더해 마음까지 푸근
9일은 안숙선 명창(61·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의 어머니 기일이다.
안 명창은 지난 7일 어머니 산소에 다녀왔다. 우리 시대의 영원한 '춘향'인 그도 이젠 할머니가 됐다. 나이가 들면서 옛 기억이 그리워진다. 어린 시절 아궁이에 불을 때면서 어머니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눴던 기억이다. 잠깐이지만, 추억을 되짚는 것만으로도 행복의 여운은 넓고 깊었다.
장녀인 그는 집안의 잔심부름을 도맡았다. 밥 지을 때가 되면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시래기를 다듬고, 수수도 갈았다. 그 때 만든 것이 시래기죽과 수수떡수제비다. 아무리 많이 먹어도 돌아서면 허기지게 했던 음식이 왜 그렇게 그리울까.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잘 말린 시래기를 오래 끓이면 뻑뻑한 게 뭉글뭉글해집니다. 그러고는 쌀을 한 주먹만 넣죠. (쌀을) '애낀다'고. 멸치 뿌셔서 넣으면 맛깔스런 죽이 됩니다. 그땐 무조건 많이 먹는 것이 최고였어요."
갈아 찐득찐득해진 수수를 수제비로 떠서 감자를 '숭덩숭덩' 썰어 넣은 수수떡수제비도 어머니가 잘 해주신 음식. 깔끔한 어머니 손맛이 깃든 수제비상를 받아 들면 마음이 푸근해졌다. 요즘처럼 더위에 입안이 깔깔해질 때면, 그 맛이 무척이나 그립다.
남원 출생인 안 명창은 아홉살 때 소리길로 들어섰다. 대금 산조 중요무형문화재보유자인 강백천(1898~1982)이 어머니의 사촌이고, 외삼촌이 작고한 동편제 판소리 인간문화재 강도근(1919~1996)이며, 이모가 신관용류 가야금산조 경남도 예능보유자인 강순영이다. 그가 열살 안팎의 나이로 전국 명창대회를 휩쓴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40대에 이미 중요 무형문화재 '가야금산조·병창 기능보유자'가 될 만큼 경지에 이르렀다.
벌써 53년 소리 인생을 맞는 안 명창은 소리 공부는 체력 관리가 우선돼야 한다고 했다. 소리는 목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약탕기에서 약을 짜내듯 온몸으로 에너지를 발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소리꾼은 권투선수와 같아요. 무대에 서면 젖 먹은 힘까지 쏟아내야 하니 '밥힘' 없으면 다리가 후들거립니다. 80∼90년대만 해도 몸에 좋다고만 하면 보신탕도 먹었는데, 나이가 들면서 채식 위주로 하려고 노력해요. 죄없는 동물들을 죽인다고 생각하면 마음도 안 좋고…."
어떤 소리든 한 번 들으면 외운다고 해서 붙은 별명이 '녹음기'. '풀쐐기'라는 또 다른 별명은 악발이 근성으로 쉼없는 연습하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처음 서울에 왔을 때 쉬는 날이라고는 1년에 딱 하루, 설날 뿐이었다. 모든 것을 소리에 건 시간이었다.
안 명창은 국악계의 큰 별인 김소희·박귀희 명창으로부터 수제자로 인정 받았을 만큼 '스승복'도 많았다. 김 명창은 세심한 어머니 같고, 박 명창은 품 넓은 아버지 같았다고 기억한다. 연습으로 피곤이 밀려올 때면 "이리 오너라" 하고는 몸에 좋은 음식을 살뜰하게 챙겨주셨다. 두 명창은 그에게 또 다른 어머니와 같았다.
박 명창은 그 시절 접하기도 힘든 '스끼야끼(샤브샤브)'를 손수 마련해주곤 했다. "야채와 고기를 국물에 넣고 데쳐먹었는데, 얼마나 맛있었던 지…. 그게 먹고 싶어 아프고 싶을 때도 있었어요.(웃음)"
김 명창은 '부추 만두'로 그의 입을 호강시켰다. 부추는 몸의 원기를 보완하는 채소. 덕분에 힘든 시절 몸이 축나지 않고 버틸 수 있었다는 안 명창은 스승이 떠오를 때면 홀로 북채를 들고 장단을 치며 소리를 한다. 세월을 녹여 창을 풀어내는 것이다.
"아쉬움이 더 많은 시간이었습니다. 이것저것 쫓아다니다가 소리를 제대로 쌓지 못한 것 같아요. 제 속에 담을 것만 담아서 나왔으면 좋겠는데, 다른 게 많이 섞이게 됐죠. 있는 것 다 덜어내고 담을 것만 담는 그런 소리를 하고 싶습니다."
지난 3일 폴란드의 '브레이브 페스티벌'에 이어 오는 8월1일엔 벨기에의 '스핑크스 페스티벌'에서 판소리 '흥보가' 공연을 앞두고 있다. 유럽 공연은 우리 소리를 세계에 알리는 자리. 안 명창은 힘이 다할 때까지 소리를 할 것이라며 화려한 무대에서 내려와 돈 없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소리의 깊은 맛을 전하는 춘향이가 되고 싶다고 했다. 이순을 넘긴 나이에도 '소리꾼'로 남으려는 욕심이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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