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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을 수 없는 밥상] 4.문규현 신부

빵과 포도주 대신한 교도소에서의 밥과 국, 잊을수 없는 감사의 만찬

1989년 9월 서울 구치소. 눈을 떴다.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며칠이나 지났을까. 간수에게 물으니 이틀간 쥐 죽은듯 잠만 잤다고 했다. 그 해 5월 평양에서 열린 세계청년학생대축전에 참가했던 임수경씨를 데리고 내려오자 곧바로 구속됐다. 정의구현사제단이 '십자가를 지라(임수경을 데리고 오라)'는 연락이 와 감행한 일이었다. 문규현 신부(전주 평화동 주임 신부)는 누군가는 져야 할 분단의 십자가였다고 했다.

 

문 신부는 '통일의 사제'이자 새만금 개펄 살리기와 부안 핵폐기장 반대 운동, 용산 참사 해결을 요구한 '생명·평화의 사제'다. 용산 참사로 목숨을 건 단식농성을 하다 의식을 잃었던 그는 이제 기력을 많이 회복한듯 했다. 단식투쟁을 밥 먹듯 하는 문 신부에게 음식은 대체 어떤 의미일까 궁금했다.

 

"단식은 한 달까지 해본 것 같습니다. 여러 번 작정하고 굶다 보니 음식이 맛있어요. 굶어봐야 맛을 제대로 알지….(웃음)"

 

그도 물론 음식을 끊는 것은 고통스러웠다. "먹고 싶을 때 먹는 게 얼마나 큰 행복이냐"며 곡기를 끊는다는 것은 죽음을 성찰하는 기도나 마찬가지라고 했다.

 

"우리 신앙인은 예수의 죽음을 전하고 부활을 선포하는 사람 아닙니까. 변화하는 신앙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인 겁니다. 죽을 만큼 기도하는 모습이 단식 아니겠어요. 자기 결단에 의한, 죽음을 선포하는 기도가 단식이죠. 죽음은 태어남을 위한 새로운 희망의 기도이기도 하고요. 기도엔 삶과 죽음의 의미가 동시에 담겨 있습니다."

 

굶기를 밥 먹듯이 하는 문규현신부도 요리를 즐긴다고 한다. ([email protected])

 

1989년 그는 서울 구치소에서 먹었던 음식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매일 미사를 집전하려 했던 문 신부에게 교도소는 빵과 포도주를 구할 수 없는 난감한 장소였다. 그래서 식단으로 나오는 밥은 빵, 국은 포도주로 대체됐다.

 

"내가 밥을 위해 그렇게 정성 들여 준비했던 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만찬의 전례를 한 뒤 밥이 들어오면 성찬식을 했죠. 정말 기뻤습니다."

 

그는 "이렇게나마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을 나눌 수 있다는 게 영광이었다"며 "빵이 되고 피가 된 신(예수)을 기억할 수 있는 음식이야말로 지상 최대의 맛이었다"고 덧붙였다. 교도소에 들어간 기념(?)으로 담배도 끊었다. "담배를 피우면 안되는 곳이지만, 다들 재주가 많아 구해오거든요. 나도 하루에 두 갑 이상 피운 골초였는데, 끊게 됐습니다. 더 피우면 살아남기 어렵겠단 싶었죠."

 

문 신부는 용산참사 해결을 위해 오체투지를 떠나기 전 기억도 떠올렸다. 그는 전주에서부터 철거민 장례식이 치러지는 서울 순천향대학병원까지 신자들이 내어놓은 떡국떡 50kg과 양파즙 300봉지를 모아갔다고 했다. 용산 참사 후 500일이 지났지만, 대정부 협상은 별다른 진전이 없을 때였다. 문 신부는 장례식을 치르기 위해 먹거리가 급했다며 유족들과 철거민들, 범대위 식구들과 함께 먹었던 떡국을 잊을 수가 없다고 말했다.

 

단식 기도로 쓰러졌다가 가까스로 깨어난 경험 덕분에 이젠 그는 잘 먹고, 요리도 즐겨한다. 가장 자신있는 요리를 물으니, 김치찌개라고 하다가 닥치는 대로 한다며 웃었다.

 

형인 문정현 신부와 함께 그는 '운동권 신부 형제'로 통한다. 익산 출생으로 5대 째 가톨릭 신앙을 지켜온 문 신부에게 사제직은 숙명과도 같았다. 어머니는 그가 신부가 되기를 원했고, 그 역시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1976년 5월 사제서품을 받은 그는 그 길로 '3·1 민주 구국 선언'사건으로 구속된 형을 면회하러 서대문교도소를 찾았다. 형은 "이제 같이 갈 동반자가 생겼다"며 기뻐했고, 그도 이를 받아들였다.

 

'희망이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땅 위의 길과 같다.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으나 한 사람이 먼저 가고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그것은 길이 되었다.'

 

문 신부는 루쉰이 한 말을 전하면서 "투사가 되지 못하고 주저앉기도 잘 한다"고 고백했다. 하지만 그는 영원히 '그 길'을 걸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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