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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십이지상에 매료됐던 일본인…노세 우시조

1926년 조선총독부가 발굴, 조사한 신라시대 한 적석목곽분에는 서봉총(瑞鳳塚)이란 이름이 붙어 있다. 이는 그 해 10월 발굴 현장을 스웨덴 황태자 구스타프 아돌프가 방문한 데서 기인한 것으로, 서봉총의 '瑞'가 바로 스웨덴의 한자 표기 첫 글자였다.

 

경주 방문에 앞서 구스타프 왕자는 황태자비와 함께 그해 9월 일본에 먼저 들렀다. 이런 그를 경주 발굴현장까지 안내한 이는 그 자신이 고고학자이며 교토제국대학 총장이던 하마다 세이류(濱田靑陵)였다.

 

하마다 또한 수행단을 동행했고 노세 우시조(能勢丑三)도 그 일원이었다. 당시 37세인 그의 신분은 교토제국대학 공학부 건축학교실 조수.

 

노세에게는 이 방문이 자신의 일생에 중대한 전환점이 된다. 이 일이 그에게 식민지 조선에서의 문화재 조사에 열을 올리게 하는 결정적 동력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메이지(明治) 22년인 1889년 8월17일 교토시(京都市)에서 태어난 노세는 자산가인 아버지에게서 막대한 재산을 물려받는다. 교토시립미술공예학교 도안화과와 교토고등공예학교 도안과를 졸업한 그는 1923년 12월에는 교토제국대학 건축학교실 조수로 취업한다. 이곳에서 고대 건축 연구에 몰두한 그는 얼마 뒤에는 도면 작성 솜씨가 좋다 해서 같은 대학 고고학교실에 배속되기도 한다.

 

아무튼 재력이 만만치 않았던 그는 경주 방문을 계기로 조선의 문화유산에 매료되어 사비까지 털어 한동안 조선 각지를 뒤지고 연구하는 생활을 계속한다.

 

재일 한국인인 가종수(賈鍾壽) 일본 슈지쓰(就實)대학 대학원교수가 최근 정리한 그의 행적에 의하면 노세는 1926년 경주 방문 이래 1931년까지 모두 10차례에 걸쳐 조선을 찾아 유적 견학과 (발굴)조사, 그리고 문화재 복원을 벌인다.

 

그의 전반적인 행적은 이렇다 할 만한 중요한 직책을 역임하지 않아서인지, 아직 학계에서도 제대로 정리되지 않았지만 가 교수에 의하면 한국 십이지상의 중요성을 가장 일찍 감지했으며 그와 관련한 선구적인 업적을 낸 중요한 연구자로 꼽힌다.

 

이 과정에서 노세는 경주 지역의 신라시대 십이지상과 개성 지역의 고려시대 십이지상 연구에 몰두한다.

 

나아가 단순한 견학에 만족하지 않고 관련 유적에 대한 발굴조사도 병행한다. 1928년 11월에는 경주 원원사 터를 답사하는 한편, 황복사터 석탑 기탄 터를 발굴조사했다. 이어 원원사터를 발굴조사하고 개성 고려왕릉에 대한 조사도 병행한다.

 

1929년 10월에는 다시 고려왕릉과 화엄사 서탑을 조사하고 원원사터에 대한 발굴을 속개한다. 이듬해 1월에는 원원사터를 실측 조사하고 성덕왕릉을 비롯한 경주 지역 신라시대 왕릉의 십이지상을 조사하는 등 1931년 말까지 조선에서의 문화재 조사 행적은 계속된다.

 

그가 조사한 유적 중에서도 원원사터에 완전히 붕괴된 채 방치되어 버린 삼층석탑을 발굴조사하고 나아가 이를 발판으로 그것을 복원한 일은 중요한 업적으로 꼽힐 만하다.

 

가 교수가 이번에 그가 남긴 유리건판 사진과 관련 도면을 발굴해 정리한 그의 행적을 보면 동탑과 서탑의 쌍탑이었던 원원사 석탑 발굴조사와 복원에 바친 그의 열정은 우리를 숙연케 할 만한 구석이 적지 않다.

 

두 석탑은 언제쯤인지 확실치는 않으나 조선 말기에 완전히 붕괴된 이후 각종 석탑 부재가 나뒹굴고 있는 상태였다. 이를 모두 수습하고 측량하는 한편, 발굴조사를 통해 기단 구조를 확인한 그는 어느 부재가 어디에 있었는지를 건축 시기가 비슷한 다른 신라시대 석탑을 참고자료로 삼아 일일이 뜯어 맞췄다.

 

가 교수가 이번에 발굴한 그의 자료들에는 이를 위해 노세가 얼마나 많은 고심을 거듭했는지를 보여주는 각종 도면도가 있다.

 

이런 그의 노력은 마침내 1931년에 두 석탑을 완전히 복원하는 일로 대단원을 고했다.

 

가 교수는 이런 그의 노력을 높이 사면서 "당시의 모든 일본인을 침략자로 매도해서는 안 된다"며 "한국의 십이지상에 매료되어 파괴된 원원사 석탑을 재건한 노세 우시조의 업적은 단지 그가 일본인 고고학자라고 해서 폄하될 일이 아니다"고 강조했다.

 

그가 남긴 한국 문화재 관련 각종 사진은 현재 일본 나라시의 문화재 전문 사진회사인 아스카엔(飛鳥苑)이라는 곳에 약 2천500장에 달하는 유리건판으로 정리가 되지 않은 채 남아있다고 가 교수는 말했다.

 

따라서 이러한 노세의 자료에 대한 우리 정부 차원의 조사와 정리가 시급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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