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심한 궁중음식이 유연한 성품 만든 것"
21일 추석 날 비는 추적추적 왔다. 날씨가 궂은 탓인지 전주 한옥마을 내 승광재를 찾는 시민들은 많지 않았다. 꼬마 방문객들이 황손 이 석씨(69)를 휴대폰 카메라로 찍으려 하자, 호기심을 보이며 순순히 응해줬다. 마치 자신의 손자·손녀를 보는 듯 했다. 그는 생존해 있는 고종황제의 3세. 무너진 왕조의 허망한 역사와 비애를 대변해온 대한제국 황제의 마지막 혈육이다. 1941년 사동궁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 상궁들의 시중을 받는 '왕자마마'로 자라던 시절도 있었지만, 그도 잠시. 생애 대부분은 역마살의 질곡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이민생활과 절을 전전하면서 가난과 고독으로 아홉 번이나 자살을 기도하는 삶이었지만, 그 모든 걸 견뎌냈다.
"내 방엔 아버지 유필 '참을 인(忍)'자가 걸려 있어요. 쉽게 생각할 수 있는 말은 아니죠."
승광재 마당 한쪽에선 방문객들이 전을 부치고 있었다. 궁중에서 먹었던 추석 음식이 생각난 듯 음식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추석이니 구정이니 하면, 상궁들이 으레 다했어요. 특히 추석은 먹는 잔치지. 음식도 수백 가지였어요. 나는 떡하고 약식을 좋아했어요. 허연 떡, 백설기를 그렇게 좋아했다고. 어머니가 나만 백설기 주고 그랬습니다. 호주머니 넣고 다니면서 먹고 그랬어요."
그는 어머니 음식 솜씨가 남달랐다고 기억했다. 그는 "아버지가 어머니 얼굴도 예쁘지만, 음식에 반한 것 같다"며 "특히 깍두기를 그렇게 맛있게 담갔다"고 했다.
"아버지가 딴 집엔 안 갔어요. 그래서 전화가 많이 왔죠. '전하는 왜 그 집에만 가요' 그랬다고."
궁중음식은 대개 맵고 짜고 시지 않고, 심심한 편이었다. 물도 찬 물이나 뜨거운 물은 못 먹게 해 미지근한 물만 먹어야 했다고 하더니 "그래서 사람들이 강하질 못했던 가봐"라고 말하며 웃었다. 웃음은 헛헛해 보였다.
"내가 다섯 살 때 해방이 됐으니까, 열 살 때까지 상궁들이 도시락을 가져다 줬어요. 도시락 반찬에서 계란찜이 그렇게 맛있어요. 고기를 잘게 다져서 만든 장조림도 입에 넣으면 녹아요. 잣 밤 대추가 들어간 보쌈김치는 또 어떻고."
한국외국어대 스페인어과에 입학한 그는 대학 다닐 형편이 안 돼 미8군 전속가수가 됐다. 황실에서 '딴따라'가 나왔다고 힐난이 심했지만, 삶은 곧 현실이었다. 1966년엔 군위대 요원으로 입대해 베트남에서 복무까지 했다. 그가 부른 히트 가요 '비둘기 집'은 당시 비둘기 부대에서 있었던 일을 노래로 푼 것이다. 제대하고 보니, 노래 부르는 게 '밥벌이'가 됐다.
10·26사태 이후 분위기는 냉혹해졌다. 황실가족들과 칠궁에 살던 그는 새로운 군부세력에 의해 쫓겨났다. 모든 것이 답답하고 화가 나 미국행을 감행한 그는 밑바닥생활부터 안 해본 게 없었다.
"새벽 6시부터 일어나서 남의 집 잔디 깎아주고, 수영장 청소도 하고, 경비도 했어요. 먹을 것이라곤 눈물 젖은 햄버거와 콜라가 전부였죠."
10년 만에 미국 시민권을 버리고, 한국을 다시 찾았다. 영친 왕비 이방자 여사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한국에 오자마자 흑인 폭동이 일어났어요. 작은 어머니가 절 살린 겁니다. 하지만 세상은 많이 변해 있었고, 살 길은 더 막막해졌죠. 오죽하면 아홉 번씩이나 자살을 기도했겠어요."
오랜 방황으로 술로 허기진 마음을 달랜 적도 많았다. 막걸리를 하루 종일 먹기도 했고, 양주를 두 병씩 마시기도 했다.
"나라 뺏기신 마음에 아버지는 매일 저녁 양주병을 들고 와서는 '내가 죽어야지, 내가 죽어야지' 하면서 술로 속을 달래며 우셨습니다. 허공에 권총을 '빵빵' 쏘기도 했다고. 그게 벌써 65년 전입니다."
고희를 눈앞에 둔 그는 살아온 길을 돌아보며 말했다. 모든 인생은 '꿈'이라고. '일장춘몽(一場春夢)'이라는 옛말이 주는 여운은 참 길었다.
"내가 황손이지만 결코 황실을 복원하거나, 군주국으로 돌아가자는 이야기를 하고 싶진 않습니다. 사라져가는 조선왕실의 문화, 잊혀져가는 조선의 역사를 복원하고 계승했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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