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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명표의 전북 작고 문인을 찾아서] ①프롤로그

전북 문화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예로부터 전라북도는 소문난 문향(文鄕)이었다. 그 덕분에 어느 시대나 지역을 가더라도 문학 유산이 풍부하다. 비록 내용이 전하지 않으나 「방등산가」, 「선운산가」, 「지리산가」 등은 백제가요의 뿌리가 상당한 근거를 알려준다. 지금까지 전해지는 한글로 된 최고의 가요 「정읍사」는 안정된 형식을 갖추고 있어서 향가의 근원을 헤아리기에 알맞다. 백제녀의 단아한 마음가짐은 춘향에게 꼿꼿한 몸가짐으로 이어졌다.

 

전북 지역의 자연환경은 동서로 판이하다. 좌도와 우도의 풍물소리에는 지역의 특징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문학적으로 동부 지역의 준험한 산세는 김시습의 「만복사저포기」에서 신비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기여하였다. 호남 제일성이었던 전주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고려 말에 이성계는 운봉전투를 마치고 귀경하던 중에 오목대에서 관향의 풍광에 글을 남기지 않을 수 없었다. 서부 지역의 평탄한 산세는 비옥한 평야를 만들어 평민들을 문학의 세계로 힘껏 끌어들였다. 고창의 동리 신재효가 판소리를 정리하여 근대 소설의 출현을 앞당긴 것도 그 영향이다.

 

또한 전북 지역의 작가들은 시대정신을 구현하느라 열심이었다. 불우헌 정극인은 정읍 무성리로 낙향하여 최초의 향약인 고현향약을 제정하였다. 그가 동네 사람들과 어울려 살면서 마땅히 지켜야 할 벼리를 제시한 것은 지행일치를 추구하던 조선조 선비의 모범사례이다. 그는 최초의 가사 「상춘곡」에서 홍진에 묻힌 무리들에게 무위자연의 삶을 자랑하여 당쟁에 골몰하는 조정의 신하들을 힐난하였다. 대한제국 융희 2년에 부안 만석동의 김상현(金相鉉)은 「국권학가」(경향신문, 1908. 12. 25)에서 "나아가세나아가세 신학문에나아가세"라고 청년학도들에게 신학문을 배우기를 권하였다. 그의 애국가사는 외래사조에 밀려나기 전의 고유한 리듬을 갖고 있다. 이처럼 사소한 리듬 하나도 국운의 성쇠와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그 뒤의 작가들은 일제에 의해 주권이 늑탈된 시대에 사는 죄로 눈을 크게 뜨고 살았다. 그들은 일경의 감시를 온몸으로 느끼면서도, 전라북도의 문학에 근대적 성격을 입혀주느라 애썼다. 해방 후의 세대는 소란한 정국의 틈바구니 속에서 문학의 위의를 지키느라 고생하였다. 이 점만 보아도 그들이 남긴 글자 하나 작품 한 편은 후세대들의 경의를 받기에 충분하다. 따라서 그들의 헌신적인 노력은 오늘의 전북 문학을 존재시켜준 원동력으로 상시 기억되어야 한다. 그들의 이름은 한국문학사에서 빛나고 있어 전북인의 자긍심을 느끼게 해준다. 그것은 작가들과의 만남을 통해서 심화 확대될 터이기에, 전북 출신 작고 문인들의 발자취를 찾아나서는 길은 가뿐하다.

 

/ 최명표 (문학평론가)

 

▲ 문학평론가 최명표씨는

 

전북대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한 뒤

 

문학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 계간 「문예연구」 편집위원으로 활동중이며, 편저로 「김창술전집」 「김해강시전집」 윤규섭 비평집 1「인식론적 비평과 문학」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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