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기사 다음기사
UPDATE 2024-12-04 06:38 (수)
로그인
phone_iphone 모바일 웹
위로가기 버튼
chevron_right 문화 chevron_right 문화일반
일반기사

[김용택의 거리에서] 시인 박정만 추모의 밤

"1987년 6월과 8월 사이에 나는 500병 정도의 술을 쳐 죽였다. 그 속에는 꺼져 가는 불티처럼 겨우 명맥만 붙어 있는 나의 목숨도 묻어 있음에 틀림없었다…. 머릿속에는 수만 가지 생각들이 한꺼번에 난마(亂麻)처럼 얼크러져서 빛보다도 빠른 속도로 밀려왔다가 밀려나갔다…. 그리하여 어떤 보이지 않는 손의 인도에 따라 머릿속에서 들끓는 시어의 화젓가락으로 시를 쓰기 시작했다. 한 편을 쓰고 나면 또 한 편의 시가 미리 대기하고 있었다. 이렇게 하여 1987년 8월 20일 경부터 9월 10일까지 사이에 나는 물경 300편 가까운 시를 얻었다."

 

위 글을 박정만 시인의 글을 옮겨 온 것이다. 박정만 시인은 정읍 산외면 상두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지인들의 말에 의하면 그는 우리가 사는 세상에 적응하기 힘든 사람이었다고 한다. 세상과 적응 하지 못한 시인들이 많았다. 천산병도 그랬고, 박봉우도 그랬다. 김남주도 그랬고, 이광웅도 박영근도 그랬다. 그들이 살기에 세상은 너무나 살벌하고 적대적이고 투쟁적이고 너무 '자본주의 적'이다. 자유로운 영혼이 숨 쉴 수 있는 공간을 찾다가 그들은 시를 찾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자유마저 박탈당했던 시대가 있었다. '한수산 필화 사건'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80년대 작가 한수산은 소설 한 대목 때문에 남산에 끌려간다. 요즘 누구를 만나느냐는 고문을 이기지 못해 그냥 박정만 시인을 만난다고 했다. 한수산과 박정만은 그리 친분이 있는 사이가 아니었다. 박정만은 그렇게 하여 정말로 억울하게 남산에 끌려 가 고문당했다. 고문 후유증에서 잠시 벗어난 시인은 어느 날 그렇게 시가 찾아와 300여 편의 시를 썼다.

 

박정만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지난 2월26일 전주 경기전 부근 한 막걸리 집에서 그를 추모하는 조촐한 밤을 가졌다. 그와 친분이 있었던 분들이 모여 그를 추모했다. 시인의 추모다운 소박하고 정답고 따사로운 밤이었다. 이 강산에 봄이 오고 있다. 이 시대에 시가 어디에 소용이 되는지 모르겠다. 시인! 참 쓸쓸하나, 그러나 시인들이 세상 어딘가에서 봄밤을 뒤척이며 시를 쓰고 있다는 것은 세상 어딘가에 인간(?)이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이 매몰찬 시대에 시인을 추모하는 밤이 있다는 것은 우리들에게 아직 눈물이 남아 있다는 증거다.

 

/ 김용택(본보 편집위원)

 

저작권자 © 전북일보 인터넷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전북일보 [email protected]
다른기사보기

개의 댓글

※ 아래 경우에는 고지 없이 삭제하겠습니다.

·음란 및 청소년 유해 정보 ·개인정보 ·명예훼손 소지가 있는 댓글 ·같은(또는 일부만 다르게 쓴) 글 2회 이상의 댓글 · 차별(비하)하는 단어를 사용하거나 내용의 댓글 ·기타 관련 법률 및 법령에 어긋나는 댓글

0 / 400
문화섹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