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간 몸 담았던 전북도립국악원 창극단 떠나는 김영자 단장
김영자 전북도립국악원 창극단 단장(59)은 "떠나는 마당에 무슨 할 말이 더 있겠느냐"며 한사코 인터뷰를 피했다. 언제나 '아니다' 싶을 땐 특유의 직설화법으로 일갈해왔던 터라 쓴소리든, 좋은 소리든 후련한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시원섭섭합니다. 국립창극단 지도위원을 하다가 2004년 여기에 와서 말 못할 어려움 많이 겪었죠. 하지만 단원들 기량이 많이 올라와서 다행입니다."
20일 전주 한옥마을 내 온고을소리청에서 만난 김 단장은 홀가분한듯 했다. 대구 출신인 김단장은 '귀' 명창이 많은 판소리 본고장에서 소리에 전념하기 위해 2001년 서울 생활을 접고 전주 한옥마을에 온고을소리청을 열었다. 완벽주의자인 그에게 전북도립국악원 창극단 단장 자리는 경상도 사람을 전라도 사람으로 만들어준 족쇄(?) 같은 것이었다.
"들려니 무겁고, 놓자니 깨질 것 같고. 솔직히 그랬습니다. 그런데 동시에 정말 좋은 인생 공부를 많이했어요. 7살때 무대에 서서 50년 넘게 소리를 해왔는데, 소리 밖에 모르는 우물 안 개구리가 사람 사는 법을 깨달았다고 할까요."
단장과 단원이 허물없이 의견을 나눌 수 있도록 하고 싶었으나,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고 했다. 칭찬 보다는 쓴소리가 약이 된다는 평소 신념이 단원들과 갈등의 골을 깊게 했다. 그는 "5년이 지나니까 비로소 눈이 뜨였다"며 "이제서야 서로 어떻게 대해야 하는 지 알 것 같은데 떠나게 됐다"고 했다.
직접 작창한 '장희빈'을 비롯해 '수궁가', '견훤' 등 그가 참여한 대형 기획 공연은 많다. 하지만 그는 좋은 공연을 올려도 부족한 점을 꼬집어줄 사람이 적다고 지적했다.
"애도 울어야 젖을 준다고 했어요. 도에서 많은 돈을 투자해 국악을 살리고 보급하려 하지만, 자세히 보면 관심이 없는 것 같아요. 국악원 원장도 예술을 잘 아는 실기인이어야 합니다. 공무원이 온다면, 적어도 임기는 확정짓고 와야죠. 이번에 국악원 조례가 개정 돼 단장이 종전 정년퇴임제에서 2년 임기제로 바뀌었는데, 2년은 너무 짧다 싶어요. 누가 오든 책임감과 지속성을 담보할 수 있는 방향이어야 할 겁니다."
김 단장은 이어 전북 국악계도 '우물 안 개구리가 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동초제 중심의 소리에 치우쳐 있는 전북 국악계가 다양한 제(유파)를 익혀야 한다는 뜻이다. 더불어 대통령상이 걸린 전주대사습놀이 전국대회를 비롯한 수많은 국악경연대회도 정리돼야 한다고 했다.
"일단 대회가 너무 많아요. 나눠먹기식으로 상을 주는 것은 예술가가 할 일이 아닙니다. 판소리는 어디 대회, 민요는 어디 대회, 이런 식으로 정리가 됐으면 해요. 이렇게 가다간 10년만 지나도 누구나 다 대통령상 타겠어요. 말이 안됩니다."
고(故) 정광수 명창에게 10년 동안 소리 '수궁가''흥보가'를 사사했으며, 정권진 김소희 성우향 박봉술 선생으로부터 다양한 소리를 섭렵한 그는 1985년 전주대사습놀이대회에서 판소리 명창부 대상을 차지하면서 명창 반열에 올랐고, 1990년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준보유자(수궁가)로 지정됐다. 남편은 아쟁 명인이기도 한 김일구 명창.
"나의 은퇴는 자리가 아니라 정신이 끊길 때에요. 그간 소리를 해오면서 만족할 만한 무대가 없었기 때문에 아직도 욕심이 납니다. 우리나라에서 최고의 재벌이 되는 것보다 제일 소리 잘하는 명창, 창극 배우로 기억되고 싶어요. 그러니까 무대에서의 은퇴는 생각할 틈이 없죠."
뭔가 일가를 이룬 사람은 "나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출발했다. 그 중 오만한 사람은 실패했고 계속 노력한 사람은 성공했다. 국악원 정년 퇴임 이후엔 무엇을 할 거냐고 묻자 8월과 10월 온고을소리청 기획 공연을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그의 눈빛은 아직도 무언가 배우는 자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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