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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왕도의 중심 익산] ⑤고대 도성 체계 갖춘 옛 도읍-(2)

미륵사, 3탑 3금당 사찰 배치…中·日에도 없는 독특한 양식

미륵사지 가람 모형 ([email protected])

2009년, 백제 최대 사찰인 익산 미륵사지(사적 제150호)의 '비밀의 문'이 열렸다. 국립문화재연구소는 사리봉안기를 비롯한 505점의 유물 발굴을 통해 베일에 가려져 있던 미륵사의 창건 과정이 당시 발굴을 통해 소상히 밝혀졌다. '백제역사유적지구'가 세계유산에 등재되려면, 익산역사유적지구는 '탁월한 보편적 가치(Outstanding Universal Value·OUV)'를 증명해내야 한다.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사리를 담은 용기) 발굴로 백제사의 판도라 상자가 된 미륵사지는 탁월한 보편적 가치(OUV)를 입증할 결정적 단서가 된다.

 

▲ 미륵사, 3개의 탑·3개의 금당을 갖춘 백제 최대 절터

 

 

미륵사는 백제 무왕(600∼641)이 세운 절로 동서 260m, 남북 640m, 대지 면적 16만5300여㎡(5만평)이 넘는 백제 최대 규모의 가람(伽藍·절)이다. 하지만 오랫동안 폐사지가 돼 무너진 석탑과 당간지주만이 이 광활한 빈터를 지키고 있었다. 원광대 마한백제문화연구소에 이어 국립문화재연구소는 16년간에 걸친 대대적인 발굴로 미륵사가 3개의 탑과 3개의 금당을 갖춘 3원 병렬식 가람임을 확인했다. 국립문화재연구소의 조사 결과 미륵사는 '삼국유사'의 기록과 같이 중앙에 목탑, 동·서쪽에 석탑을 두고 긴 복도로 연결된 것으로 확인됐다. 복도에는 각각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중문이 있고, 탑과 금당은 중원(中院)·서원(西阮)·동원(東院)으로 구분됐다. 백제 가람의 대표 양식인 1탑 1금당이 3개로 연결된 독특한 구조다. 이는 우리나라나 중국, 일본에도 유례가 없는 특이한 형태로 백제 문화의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입증하는 가장 빛나는 유산이다.

 

미륵사지 금제사리봉안기 ([email protected])

 

▲ 목탑의 양식을 잘 구현한 미륵사지 석탑

 

1400여 년 전 백제 무왕이 지었다는 미륵사에 남겨진 것은 동·서쪽에 있었던 두 석탑이었다. 동탑과 중원의 목탑은 대부분 소실됐으나, 남겨진 서탑 미륵사지 석탑(국보 제11호)은 현존하는 동양 최고·최대 석탑이다. 정교한 백제의 나무탑을 돌로 재현해 정교한 기술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석탑의 이중 기단 위에 각각 4개 초석을 세우고 민흘림(기둥 밑동에서 꼭대기까지 직선으로 조금씩 가늘게 한 흘림), 안쏠림(기둥의 머리를 안쪽으로 약간씩 기울인 양식), 귀솟음(양쪽 끝이 중심보다 높게 올려주는 기법)이 있는 돌기둥으로 벽면을 만들었다. 이는 미륵사지 석탑이 목탑에서 석탑으로 변화되는 중요한 단계를 보여주는 증거라 할 수 있다.

 

▲미륵사 사리장엄구 유물은 백제 공예 유물의 연대를 밝혀주는 기준으로 활용된다. 사리공(舍利孔·사리장엄 안치 공간) 안에서 발견된 금으로 된 사리호(舍利壺·사리를 담은 병)와 석탑 조성 내력을 적은 금판인 사리봉안기(舍利奉安記), 원형 사리합, 장식용 칼, 유리구슬 등은 우아하면서도 정밀한 세공기법을 자랑하는 백제 후기 문화를 보여주는 국보급 유물이다. 미륵사지 발굴 조사에서 국내 최초로 발견된 귀중한 유물 중 하나가 금동풍탁(절이나 석탑, 누각 등 처마 끝에 다는 작은 종)이다. 금동풍탁은 당좌(종을 칠 때 망치가 닿는 자리)에 연화문이 새겨지는 등 우리나라 범종의 시원 양식으로 추정되고 있다.

 

▲ 무왕과 선화공주 러브 스토리… 사회통합을 위한 통치 원리의 산물

 

사리봉안기로 인해 서동(무왕)과 선화공주의 국경을 초월한 사랑을 노래한 '서동요'가 허구일 가능성이 제기됐다. 미륵사를 창건한 백제왕후는 선화공주가 아닌 좌평 사택적덕의 딸인 것으로 기록됐기 때문이다. 그간 학계에서 삼국 통일을 놓고 격전을 치르던 백제의 왕과 신라의 왕이 사돈을 맺는 게 과연 가능할까라는 의문이 있었던 게 사실이다. 고려 후기 일연(1206~1289)이 편찬한 '삼국유사'는 삼국 통일 후 수백 년 후에 쓰여진 데다, 통일을 이뤄낸 신라의 역사 담론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할 것이라는 게 이유였다. 그렇다 하더라도 역사적 사실과 설화적 내용을 분리해서 바라봐야 하기 때문에 '서동요' 자체의 의미가 퇴색될 이유가 없다는 입장도 있다. 무왕의 출생, 결혼, 선화공주와의 로맨스 등 무왕의 일대기가 스토리텔링으로 살아있다는 점에서 탁월한 보편적 가치(OUV)를 갖는다는 해석이다. 이들의 로맨스가 미륵사의 연기설화라기 보다는 무왕의 사회통합 원리를 담고 있는 정치적 사상이라는 해석까지 나아간다. 문이화 원광대 마한백제문화연구소 책임연구원은 "무왕이 빈번하게 신라를 공격해 정치적 기반을 다졌으나, 선화공주와의 결혼을 통해 화합의 논리를 펼쳤다고도 볼 수 있다"며 연기설화에만 갇힌 제한된 해석을 경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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