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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미연의 유물 유적으로 만나는 전북국악사] 38. 가야금산조 명인 신관용 - '전북제 가야금' 중시조로 평가

사진 한장 달랑 남아…손때 묻은 가야금·묘소까지 아득

가야금 연주사의 한 켠에 묻혀있는 신관용(1912-1961)은 50세의 짧은 나이로 생을 마감했지만 일제강점기 전북을 중심으로 활발한 음악활동을 전개했던 가야금 산조의 명인으로 '전북제 가야금'의 중시조로 평가받고 있다.

개인적으로나 민족적으로 매우 어렵고 고통스러운 시대를 살면서도 감명 깊고 개성적인 값진 가야금산조를 오늘에 남겨놓은 그는 전북지역에 국한되어 살아온 삶과 예술세계로 인해 오늘의 사람들과 국악사에 잊혀져가고 있는 사람이다.

일제강점기의 암울한 사회적 배경에 따른 침체기와 서양음악이 이 땅에 전래된 뒤 음악사의 맥을 뺏긴 전통음악, 그중에서도 민속음악의 길을 걸어온 한낱 지방 음악가에 지나지 않은 사람들의 자취가 역사 속에서 어떻게 사라졌는지 그가 남긴 음원 몇 장과 유일한 사진 등이 대신 말해주고 있다.

특히 전북지역을 중심으로 떠돌며 살아온 신관용은 그의 음악세계를 조명할 수 있는 가야금산조 한바탕을 이어 오게 했지만 본인이 직접 연주했다는 산조테이프를 통해 궁핍한 시대에 민속음악인의 삶의 진실과 미의식을 탁월하게 보여주고 있다.

김제에서 태어난 그는 전주는 물론 군산, 정읍, 멀리 경남 진주권번에서 후학을 지도하며 전북제를 상징하는 가야금산조를 탄생시켰다. 어느 누구도 따들 수 없는 가야금산조의 기교로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심금을 울렸으나, 그에 대한 조명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이영채에게 가야금산조를 익히고 강순영, 송창섭, 주선희 등 당대를 대표하는 연주자를 길러낸 신관용은 말년에 아편으로 인해 고통스러운 삶을 영위했듯이 가야금산조에서도 슬프고 아픈 가락을 한 시대를 살아갔다. 현재 그의 묘는 김제시 복중동에 있는 산소마저 현대화 물결에 밀려 공단 이전사업으로 인해 소멸되어 그의 발자취는 이제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는 상황이다.

신관용의 음악세계는 탄탄한 미학을 근거로 전북의 미감을 표현하고 있다는 평이다. 지난 1990년대 그의 후손을 찾아 촬영한 유일한 사진은 그나마 이제 그를 대변하는 유물이 되고 있다. 그리고 전주교대 학장을 지냈던 김만곤씨가 소장했던 그의 유일한 유물이었던 가야금도 이제는 행방을 알 수 없어 안타깝기만 하다.

산조는 명인의 연주에 따라 다양한 색채와 빛깔로 그 모양새를 드러낸다. 전남제, 충남제와 달리 전북인의 마음을 녹녹하게 담아낸 전북제 가야금산조의 중심에 있는 신관용류 가야금산조. 전북제 가야금산조를 상징하는 신관용에 대한 재조명작업이 필수적인 것도 이처럼 전북인의 모습과 지혜를 반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끝)

/전북도문화재전문위원·한별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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