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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출신 창암 이삼만은 평생 지역서 활동한 호남 명필

자연 예술로 승화한 '창암체' 창시 / 칡뿌리·죽필 등 서민적 재료 사용 / 추사·강암 밀려 업적·명성 빛 못봐

▲ 창암 이삼만의 서첩. 전북일보 자료사진

창암은 전주 출신으로 평생 지역에서 글씨를 쓰며 살었던 국내파 서예가였다. 추사 김정희, 눌인 조광진과 함께 조선 후기의 3대 명필로 일컬어진다.

 

특히 그의 글씨는 물이 흐르듯 춤을 추는 ‘유수체(流水體)’다. 60세가 넘어 완성했다는 이 글씨체는 자연을 예술로 승화해 조선 고유의 서예미를 구현했다는 평이다. 그의 서체는 ‘창암체’로도 불렸다. 기존 글씨체로는 초서(草書)에 능했다. 그는 스스로 중국 진나라 주정과 당나라 유공권, 신라 김생의 글씨를 토대로 공부를 했다고 한다. 이를 바탕으로 자연의 변화를 먹과 붓으로 담아 새로운 글씨체를 선보였다.

 

창암은 서민적인 재료와 도구를 사용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당대 중국산 종이, 먹, 붓 보다는 갈필(葛筆, 칡뿌리)이나 죽필(竹筆)을, 종이도 삼베나 헝겊을 빨아 사용하거나 바위에 썼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하지만 글씨에만 몰두하다 가세가 기울었다고 알려졌다. 이름도 이와 관련이 있다. 서예에 매진하다 학문·교유·결혼이 늦었다고 스스로 이름을 바꿨다는 이야기다. 이와 함께 선비가 일생에서 해야 할 교육·출사·저술이 늦어졌다는 의미로 개명했다는 주장도 있다.

 

그의 작품은 도내·외 곳곳의 사찰이나 정자의 편액(扁額)으로 남았다. 남고산성 서문지에 있는 남고진사적비 휘호를 비롯해 전주 제남정(濟南亭), 하동 칠불암(七佛庵)의 편액, 전남 구례 천은사와 김제 금산사 보제루(普濟樓)의 현판 등이 있다.

 

강암 송성용, 석정 황욱 이전의 효산 이광렬, 석정 이정직 등보다 선대로 호남의 명필로 이름을 알렸고, 그 명성이 중국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하지만 그의 업적이나 명성은 생전에는 16살 아래인 추사 김정희에, 사후에는 강암 송성용에 치여 크게 조명받지 못했다는 평가다. 김정희는 서울 명문가 출신의 중국 유학파로 관직을 지내며 조선을 대표하는 서예가였지만, 창암은 지역 출신으로 평생 전주와 정읍을 오가며 호남의 명필로 살았다.

 

후대에는 강암의 그늘에 묻혔다는 게 도내 전문가들의 해석이다. 창암은 양반이었지만 글씨에만 몰두에 가세가 기울었고, 직계 후손이 없다고 알려졌다. 말년을 제외하고는 기록이 상대적으로 적고 유품이나 자료가 많지 않다는 설명이다.

 

더불어 창암의 작품은 모조품도 상당하다는 후문이다. 지난 2011년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 열린 ‘창암 탄생 240돌 특별전’에 출품한 일부 작품이 모조품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도내 한 화랑 관계자는 “창암의 제자 글씨에 스승의 낙관을 찍은 작품이 시중에 나돌기도 한다”고 귀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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