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향정 정취에 반한 많은 문인들 시문 남겨 / 비비정서 바라본 만경강 백사장 한폭 그림
여름이 한창이다. 날이 더워지니 시원한 곳을 찾게 된다. 이럴 때 우리 선조들은 멋진 풍광이 드리워진 곳에 정자를 짓고, 인간이 사는 현세와 신선들이 산다는 아름다운 자연의 경계에서 더위를 피하며 풍류를 즐겼다.
전북에는 춘향이의 이야기로 유명한 남원의 광한루(廣寒樓)와 전주의 한벽당(寒碧堂), 순창의 귀래정(歸來亭)을 비롯하여 옛 정취가 담긴 정자들이 남아있다.
정읍에는 ‘피향정(披香亭)’이 있다. 피향정은 연지(蓮池), 흡향정(吸香亭), 피향각(披香閣), 피향당(披香堂) 등 불리는 이름이 많았던 정자이다. 주로 불리는 피향정은 향국(香國)을 둘로 나누었다는 뜻을 지녔는데, 정자를 중심으로 ‘상연지제(上蓮池堤)’와 ‘하연지제(下蓮池堤)’ 두 연못으로 나뉜 곳에 연꽃의 향이 가득 차 불렸던 이름이다. 하지만 일제시대 상연지는 메워져 길과 민가가 되었고 지금은 하연지만 남아있다. 이는 일제가 피향정에 담긴 역사적 의미와 민족정신을 말살하려던 의도였을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피향정은 호남에서 손꼽히는 정자로 보물 제289호로 지정돼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상연지가 있던 앞쪽에는 피향정이라 쓰인 현판이 있고 하연지 쪽에는 ‘호남제일정(湖南第一亭)’이라는 현판이 걸려있으며, 피향정 천장에는 옛 사료에 근거한 연꽃무늬가 복원되어 피향정의 정취를 자아내고 있다.
피향정은 이름 의미 속에 담겨 있는 연지(蓮池)만 특별한 것은 아니다. 관청의 손님도 맞고 종종 숙박의 기능을 하며 많은 이들의 발길이 닿았던 곳으로, 집 한 채와 맞먹을 정도의 큰 규모로 수많은 사연을 품고 있다. 정면은 5칸, 측면은 4칸의 아름다운 겹처마 팔작지붕의 건물로 28개의 화강암을 기초석으로 삼았는데 그 모양이 각각 다르다. 기초석이 30개 들어갈 규모인데 2개를 빼고 28개로 한 것은, 당시 천문을 나누는 기준이었던 우주의 28숙(별자리)을 따른 것으로 선조들의 깊은 뜻을 엿볼 수 있는 정자이다. 이러한 피향정의 멋과 의미 덕분인지 정자에는 많은 문인이 찾아 시문을 남겨 전해 내려오고 있다.
피향정은 여러 기록을 살펴보아도 누가 언제 처음 지었는지 분명치 않다. 다만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 의하면 조선시대 광해군 때인 1616년에 현감 이지굉이 초라했던 건물을 중건하고, 이후 확장 중건을 한 차례 더 거쳐, 1716년(숙종 42년)에 현감 유근이 전라감사와 호조에 청하여 정부의 보조로 재목을 변산에서 베어다가 중수하면서 연못을 파서 넓혔다고 한다. 그 후, 1855년(철종 6년) 현감 이승경이 새롭게 중수한 것이 지금에까지 남아있다 하며 한국전쟁 이후에는 태인면사무소로 사용되어 오다가 1957년 면사무소를 신축하면서 환원되었다.
그리고 신라시대 최치원이 이곳 태수를 지내는 동안 근처에 있는 연못 주변에서 풍월을 읊었다 전해지고, 이 때문에 최치원이 피향정을 지었을 것이라는 설도 있지만 이에 대한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최치원의 흔적을 기리는 축제와 관련 이야기는 남아 피향정의 가치를 가꾸어 주며, 피향정 곁에는 오랜 역사가 새겨진 비석군(碑石群)이 줄지어 서서 고을의 사연과 피향정의 지난 시간을 말해주고 있다. 그 비석군 가운데에는 임꺽정의 저자인 홍명희의 부친으로 태인군수를 역임했고 나라를 잃은 상실감에 자결한 우국지사 홍범식(1871~1910년)을 기리는 애민선정비도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동학농민혁명의 단초 중 하나로 농민들의 수탈로 만들어져 원망을 샀던 고부군수 조병갑의 부친 조규순의 영세불망비도 함께 있어 역사 속의 허물을 되돌아보게 한다.
완주에는 ‘비비정(飛飛亭)’이 있다. 조선시대 1573년(선조 6년)에 최영길에 의해 창건되었다. 비비정의 이름은 지명을 따와 지어졌다고도 하지만, 최영길의 손자 최양이 정자의 제호와 휘호를 우암 송시열에게 부탁하여 지어졌다는 사연이 송시열이 쓴 기문인 『비비정기』에 정자명의 유래로 나온다.
송시열은 무관을 지낸 최영길과 그의 아들 최완성, 손자 최양을 언급하면서 최양이 살림이 넉넉하지 못한데도 정자를 보수한 것은 효성에서 우러난 일이라 칭찬했다. 또 최양의 장대한 기골을 보고 장비(張飛, 중국 삼국시대 명장)와 악비(岳飛, 남송 명장)를 떠올렸고, 그들이 용맹뿐 아니라 충절과 효로도 알려진 사람이니, 날 비(飛) 두 자를 써서 귀감으로 삼는다면 정자의 규모는 비록 작아도 뜻은 큰 것이라고 하였다.
비비정 아래는 만경강이 굽이쳐 흐르고, 주변으로 풍요로운 평야가 펼쳐져 있어, 내려다보는 경치가 아름답다. 게다가 이곳은 전라도 이남에서 수도로 오가는 사람 대부분 거쳐 갔던 길에 자리 잡아 수많은 사연이 지나고, 각종 해산물과 소금을 실은 배가 오르내렸던 물자의 길목에 있었다. 선비와 나그네들이 비비정에서 발걸음을 멈추어 쉬어가며, 시와 글을 지으며 풍류를 즐겼음은 물론이다.
비비정에서 바라보는 풍경을 ‘떨어질 낙(落)’과 ‘기러기 안(雁)’을 써서 ‘비비낙안(飛飛落雁)’이라고 부르는 것도 특별하다. ‘백사장에 내려앉은 기러기 떼를 비비정에서 바라보는 모습’이 한 폭의 그림 같다는 의미로, 비비낙안은 ‘완산팔경’과 만경8경 중 제5경에 해당하기도 한다. 비비정은 비록 1752년 관찰사 서명구(徐命九)의 중건 이후 오랜 세월 관리가 부실해지면서 소실되었지만, 1998년 복원되어 풍광 좋은 그 자리에서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예로부터 정자는 쉼을 건네는 장소이고 선비의 장소로 정신을 나누며 사람들을 불러들인 곳이었다.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주변의 모습도 바뀌었다지만, 이제 완주의 비비정은 근처 만경강 다리 중 유일하게 문화재로 등록된 구 만경강 철교와 더불어 호산서원과 삼례토성을 곁에 품고 시간의 흐름 속에서 우리를 부르고 있다.
그리고 정읍의 피향정엔 그 이름의 의미가 담긴 연꽃이 만개했다. 하지만 상연지가 복원되지 않아 그 이름을 이제 피향정으로 올곧이 부르기엔 부족하다. 일제에 의해 훼손된 피향정의 의미를 되살리는 일이 절실하다. 하지만 길과 민가로 되어버린 상연지를 복원하는 데는 큰 자금이 들어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 치더라도 피향정이 가진 본연의 의미를 찾는데, 모두가 힘을 합쳐 볼 일이다.
그리고 비비정 옆 호산서원과 사당도 입구의 홍살문이 서운치 않게 정성껏 복원되길 기대한다. 함께 제자리로 돌아가는 여정이 길지라도 말이다. 그러한 소망을 지닌 채, 이 여름 피서 겸 선조의 정취가 깃든 장소를 찾아 비비정의 강바람도 담고 피향정의 연꽃향에 우리 마음도 함께 담아 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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