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남도주유소 골목 일대 10개 안팎 테이블 갖춘 작은 음식점들 자리잡아 / 40년 내공 담긴 메밀국수·소머리로 국물 낸 설렁탕·얼큰~얼얼 순대국밥까지 / 넉넉하지 못한 주차공간·낯선 골목길로 헤매지만 금융기관 밀집 명맥 이어
‘남도주유소’는 한 때 전주 금암동의 랜드마크격이었다. 주변에는 대형 보험사 건물이 즐비하고, 금암1동주민센터와 전북일보 등이 자리하는 데도 근방 약속 장소를 찾을 때는 곧잘 남도주유소를 떠올렸다. 큰 규모도 아니고, 대중적으로 이용하는 곳도 아닌 ‘남도주유소’가 왜 금암동 일대의 길잡이가 됐을까. 큰 도로변 네거리에 접한 위치상 특성과, 큰 빌딩 들어서기 전에 일찌감치 자리를 잡은 선점 효과 때문이었을 게다. 주유소가 지난해 철거되고 현재 커피숍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나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는 ‘남도주유소 골목’이다.
백제로와 기린로를 옆에 둔 옛 남도주유소 일대의 금암동 번화가는 전북은행 본점과 국민은행, 농협, 신협, 수협, 새마을금고, 보험회사 등 금융관련 회사가 밀집되어 있다. 또 인근에 시외버스와 고속버스 터미널 등이 있어 유동인구가 많은 교통의 중심지다. 그럼에도 덕진구 안에서 금암1동은 주민등록인구가 가장 적다. 금암2동을 합쳐도 2만명 정도에 불과하다. 아파트 보다는 단독주택, 원룸이 많아서다.
옛 남도주유소 뒤편은 백제로가 뚫린 이후에도 달리 변화가 없었다. 좁은 골목길로 이어지면서 낯선 이가 목적지를 찾으려면 미로를 헤매기 일쑤다. 주차할 공간도 넉넉하지 못하다. 이런 불리한 여건에서도 이곳에는 오래된 맛집이 많다. 옛 남도주유소와 전북은행 본점을 대각선으로 삼을 때 몇 안 되는 주택과 원룸을 제외하고 모두 음식점이라고 할 만큼 보이는 게 맛집이다. 이곳 맛집이 발달할 수 있었던 것은 금융기관과 전북대 등 큰 기관을 끼고 있어서다. 기본적인 고객을 확보한 까닭에 다른 지역과 달리 상대적으로 음식점의 생존기간이 긴 편이다.
줄잡아 30여개 안팎에 이르는 이곳 맛집들은 전반적으로 규모가 작다. 대부분 음식점들이 10개 안팎의 테이블을 갖고 있을 뿐이며, 자체 주차장을 갖지 못한 경우가 태반이다. 특정 음식업종으로 집중되지 않은 다양성도 이곳 맛집 골목의 특징이다. 일반 백반에서부터 분식, 중국음식, 고기, 참치, 설렁탕, 추어탕, 순대국, 약식 집에 이르기까지 골고루 분포돼 있다. 이곳 맛집 골목을 선택할 때 뭘 먹을까 고민할 필요가 없다. 별 생각 없이 그저 골목 한바퀴를 돌면 당기는 메뉴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곳은 또 낮 유동인구가 많아 저녁보다 점심에 더 붐빈다. 몇 업종의 음식점을 제외하고 1만원 안쪽에서 간단히 식사를 해결할 수 있는 곳이 대다수다.
△금암소바
이렇게 고만고만한 음식점들이 즐비한 이곳에서도 맛집 골목의 대표 선수는 있게 마련이다. 그 하나가 금암소바(주인 황옥주, 69)다. 금암소바는 여름이면 손님들이 줄 서 기다릴 만큼 전국적인 명성을 갖고 있다. 방에 있는 2개 테이블을 포함해 총 11개 테이블에 불과하지만, 하루 고객 700~800명이 이 집의 맛을 보증한다. 소바의 맛은 국물에 달렸다. 담백하면서 시원하고 진한 국물맛이 이 집 소바의 특징이다. 그 비결을 묻자, 주인 황씨는 빙그레 웃는다. 웃음 뒤에는 어찌 영업비밀을 캐느냐는, 말도 안 되는 질문이라는 뜻을 담아서다.
국물 맛의 비밀과 관련해 7~8년 전 이런 일화도 있었단다. 일본인 4명이 손님으로 와서 이 집 메뉴인 소바와 냉면, 콩국수 등을 고루 먹은 뒤 대뜸 일본에 분점을 내자고 제안했다. 소바의 본고장인 일본에서도 금암소바의 맛을 내지 못한다면서다. 어렵다고 말하자, 사례비를 줄테니 비법이라도 전수해달라고 했다. 주인 황씨의 대답은 물론 천부당만부당이었다. 금암소바의 진한 국물 맛은 중독성이 있는 모양이다. 미국으로 이민한 교포 중 여름이면 꼭 이곳을 찾는 분이 있다고 했다. 이 교포는 국물을 얼려서 미국으로 보내달라고 할 정도란다.
황씨가 내는 소바국물은 40년 가까운 내공이 담겼다. 전주시내 유명 소바집(진미식당)에서 10년간 소바국물을 전담했던 경력도 있다. 소바 국물의 오묘한 맛은 기본적으로 재료에서 나온다. 멸치·홍합·다시마·반지락 등 16가지의 싱싱한 재료를 3~4시간 끓인 후 간장·정종 등으로 간을 맞춘다. 한 두가지 재료를 빠트리거나 재료의 분량이 맞지 않으면 제 맛이 나지 않는다. 황씨는 좋은 재료와 재료간 조화가 맞아야 한다고 비법을 귀띔했다. 음식점을 하는 사람들에게 팁이 될 만한 말도 했다. 손님 하나 하나의 입맛에 맞추다보면 음식을 버린다는 것이다. 손님마다 식성이 다른 데 그 입맛에 따르다보면 본연의 맛을 잃게 될 것을 경계하는 말이다. 주인의 맛으로 표준화해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28년간 같은 맛으로 금암소바의 오늘에 있게 한 것도 개개 손님의 맛이 아닌, 그의 맛이었다.
맛의 변화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예전에 비해 국물이 싱거워졌다. 소바는 짜야 맛을 내는 데, 건강을 생각하는 고객들이 아무래도 짠 음식을 기피하는 경향이 있어 그런 쪽으로 변했다. 국물 맛과 함께 이 집의 메밀면도 차별성이 있다. 식품회사가 아닌, 일반 가정에서 뽑는 면을 사용한단다.
손님이 많으면 으레 큰 집을 구하고, 치장에 신경을 쓰기 마련이지만, 금암소바는 28년째 현재의 장소에서 그대로 있다. 흔히 분점을 통해 번화가로 향하거나 서울로 진출하지만 주인 황씨는 그저 금암동 맛집골목의 터줏대감으로 만족한다.
△봉이설렁탕
전북대 신 정문 앞에 자리 잡은 봉이설렁탕(주인 이양임, 73)도 금암동 맛집골목을 대표하는 곳이다. 설렁탕은 물가변동의 잣대로 쓰일 만큼 서민들에게 인기 있는 보양식이다. 옛 전북교육청 인근에서 현재는 중화산동으로 이전한 60년 전통의 신씨네설렁탕을 비롯해 경원동의 연지회관, 송천동의 족보설렁탕 등 전주시내 에서 설렁탕 잘하는 집도 많다.
소의 머리, 무릎도가니, 뼈다귀 등을 넣고 푹 끓여 우려낸 설렁탕의 국물은 뽀얗다. 봉이설렁탕은 국물을 내는 데 소머리를 주로 사용한다. 설렁탕 추세가 살코기 쪽으로 변하는 데 비해 이곳은 소머리를 고집한다. 5시간 정도 뼈를 고아서 고기국물과 합쳐 내놓는 이 집 설렁탕은 고소한 국물과 쫀득쫀득한 고기 맛이 특징이다. 94년 문을 연 뒤 지금까지 이곳을 지키고 있다. 주인 이씨는 10년 가깝게 동생이 운영하는 인근 벽계가든에서 고기를 다뤘다. 다대기·김치·깍두기·파김치 등 밑반찬은 지금도 본인 담당이며, 고기와 국물은 아들(오민섭, 42)에게 전수했다.
이곳 역시 점심때면 16개 테이블이 손님들로 넘친다. 농구시즌이면 KCC 선수들의 아지트. 선수들이 땀을 많이 흘리기 때문에 자극적인 음식을 피하고, 속을 다스리는 데 적합한 음식이 설렁탕이란다. 요즘 같은 여름에도 하루 150~200명 정도가 다녀간다.
금암순대(주인 이정숙) 역시 금암동 맛집의 터줏대감. 허름했던 바로 앞집에서 테이블을 늘려 이사한 후에도 계속 문전성시다. 집 분위기는 시골스러웠던 옛집이 더 정겨웠던 아쉬움도 있다. 전북 지역 곳곳에 산재한 유명 순대집과 비교할 때도 맛과 양, 밑반찬 등에서 결코 빠지지 않는 집으로 추천되고 있다. 금암순대에서 1차로 얼얼할 때 좀 서운하다 싶으면 인근 새움가맥이 그 뒤를 책임질 수 있다. 올 가맥축제에도 초대 받은 이곳은 더 깊은 골목에 자리잡은 숨은 가맥집이다. 한옥마을 베테랑 칼국수집을 연상시키는 금암면옥, 약초를 이용한 자연음식점 감로원, 팥칼국수의 정주분식, 닭곰전골의 정둔면옥, 쌈밥집 쌈가 등도 금암동 골목을 지키는 맛집들이다.
△금암소바(278-0945)=소바(보) 6000원, 콩국수(보통) 6000원, 냉면(보통) 6000원, 사리 2000원, 콩물(1.5ℓ) 8000원
△봉이설렁탕(271-0912)=수육 3만6000원, 접시수육 1만8000원, 사골떡국 8000원, 영양설렁탕(인사+버섯+대추+떡) 1만1000원, 설렁탕 9000원, 물만두4000원
△금암순대(272-1394)=암뽕모듬(대) 2만 5000원, 막창모듬(대) 2만원, 머리고기(대) 1만 8000원, 순대 1만원, 순대국밥 8000원, 머리국밥 6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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