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쓸쓸함 토닥거리며 빈칸 건너가면 좋을 것
“길이 끊어지면 발로 툭 지구를 기절시켜”(‘그러나 사과는 꽃관을 준비하고’ 중).
누구나 빈칸을 가지고 이 땅에 온다. 그 빈칸에 서면 설렘과 두려움, 그리고 희열이 교차한다. 그러다 당신에게 건너가고 싶다. 등을 맞대면 사람 ‘人’자가 될 것 같다. 당신도 ‘건너와’라고 빈 어깨를 건드린다. ‘문학 나눔 우수도서’로 선정된 지연 시인의 시집 <건너와 빈칸으로> 를 읽으면 좋을 때다. 건너와>
빈칸으로 오라고 했는데, 가보니 빈칸이 아니다. 일어나면 하루 종일 가지고 놀 시를 챙기는 습관 덕에 시인의 거울신경은 늘 시를 비춘다. 그래서 매혹적인 언어가 수면에 가득하다. 시인은 “무인 택배함에 방치된 봄”(‘무인 택배함’ 중)을 찾아 옆구리에 끼고, “늘 샘플처럼 웃어야”(‘배웅’ 중) 하는 날들을 발로 차면서, “웃음의 잔고를 찾아”(‘빈칸’ 중) ‘코타키나발루’로 가자고 귀엣말을 건넨다. “대화에 땀이 나 발목이 시리”(‘구름의 서쪽’ 중)더라도 “바닥을 핥은 해는 모란으로 피어”(‘자개농에 발자국을 끊으며 들어가겠어’ 중) 난다고 말에 힘을 뺀다.
시집을 읽고 슬픔 하나 남을 수도 있겠다. 시인이 의도하지 않아도 모든 순간이 빈칸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빈칸 안에서 꿈틀거리면서 벗어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제 빈칸을 채우며 살다가 제 무덤을 안는 일이 우리의 숙명이다. “살아서 우리는 등에 영정 사진을 달고 다니는 것이어서/ 죽어서나 앞모습으로 사는 것이어서”(‘이편의 식사’ 중), 우리는 안녕이라는 원형 향을 꽂으며 타인을 만난다. 그러다 “문구점 피자 치킨 커피 쿠폰들에 도장 찍으면 이 세상에 허락된 기분이”(‘안개 저장고’ 중) 든다.
햇살은 텅 빈 곳에 머문다. 시집을 덮으면 나의 창고는 비어있다. 그 ‘비어 있음’으로 빈칸이 되어 당신에게 건너가고 싶다. 다만 ‘다음’을 건네주는 시인의 마음을 잊지 않고 싶다. “웃음을 구우려면 몇 도의 어둠이 필요한가”(‘당신이 내내 전화를 받지 않아’ 중). “창문을 오래 문지르는 습관/ 초원으로 뛰어나갈 가능성을 가늠하는”(‘오후의 입장’ 중).
오늘 만난 당신과 당신 안에 내가 아름다운 쓸쓸함을 토닥거리면서, 이 빈칸을 건너가면 좋을 것이다. 비가 온다. 줄임표 같은 비가 보일러를 두드리고 있다. “꽃관 울음씨 하나 우주를 떠도는 시간”(‘그러나 사과는 꽃관을 준비하고’ 중), 누군가에게 안부를 묻듯 빈칸에 앉아 자신을 바라볼 일이다. 그러면 아련한 ‘빈칸’이 눈 뜰 것이다. “우주 난간에서 실눈을 뜬 누에처럼 나는 쓸쓸히 휘황하고”(‘옥수수 대궁에 앉아 시집을 읽으면’ 중).
* 이영종 시인은 2012년 전북일보 신춘문예에 시 ‘노숙’이 당선되었고, 15회 박재삼문학제 신인문학상 백일장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지평선 시동인이며 전북과학대학교에 출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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