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완규(원광대학교 역사문화학부 교수)
요즘 박물관을 관람하다 보면 전시유물의 이해를 돕는 설명 패널과 유물 명패에서 어렵지 않게 ‘마한’이라는 단어를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나주에 자리하고 있는 국립박물관이 영산강유역의 마한문화를 정리하고 발굴조사에서 수집된 자료를 중심으로 건립된 박물관이라는 점은 격세지감마저 들게 한다. 사실 지금처럼 명쾌하게 역사적 정치체로서 마한이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은 그리 오랜 일이 아니다. 오늘날 시각에서 보면 영산강 유역의 마한문화를 대표적으로 상징하는 대형 옹관마저도 1990년대 초까지는 광주 박물관 전시유물의 명패에 「백제시대 5~6세기」라 쓰여 있을 정도였다. 그것은 90년대 초반까지 마한과 백제문화를 구분할 수 있는 학계의 연구가 미미한 수준의 현실을 그대로 방증하는 증거이기도 하다. 또한 마한은 백제에 의해 일시적으로 정복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점진적으로 병합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마한과 백제의 관계를 대나무와 죽순에 비교될 정도로 두 정치체를 구분하는데 어려움을 보여주는 단면이기도 하다.
1917년 일본인 학자 야쯔이에 의해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나주 신촌리 9호분에서 금동관모와 금동신발 등이 발견됨에 따라 이 지역에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곧 신공황후의 삼한정벌설에 심취했던 그는 무덤 주위에 들러진 도랑을 근거로 왜인의 무덤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1999년에는 국립문화재연구소 주관으로 재발굴조사가 이루어져 일인 학자들의 발굴에서 소홀히 다루었던 정보를 구체적으로 얻는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마한문화의 정체성에 대한 구체적인 접근은 1970~80년대에 걸쳐 국립광주박물관의 설립과 호남지역 대학교에 고고학 관련 학과가 설립되면서 본격화되게 된다. 국립광주박물관과 각 대학 박물관이 주동이 되어 영산강유역의 영암과 나주일대의 대형 옹관고분에 대한 발굴조사가 체계적으로 이루어지면서 이 지역의 문화양상이 백제문화는 뚜렷이 구분되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이러한 조사를 바탕으로 영산강유역의 마한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고, 각 지방자치단체에서는 지역별로 역사문화의 정체성 확립을 위한 많은 노력이 이루어졌다.
1990년대에 건설된 서해안고속도로 구간에 대한 문화유적 조사는 비로소 마한문화의 정체성을 좀 더 분명하게 인식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곧 마한의 옛 영역에서 서해안을 따라서 이루어진 조사는 마치 마한 전역에 대한 샘플 조사와 같은 효과를 보여 백제문화와 구분되는 마한문화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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