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완규 (원광대학교 역사문화학부교수)
풍속의 사전적 의미는 “옛날부터 그 사회에 행하여 온 사람의 생활 전방에 걸친 습관”이라 정의 되어 있다. 우리는 한 사회 속에서 전해오는 습관이란 종족이나 국가라는 틀 속에서 공동체적인 행위를 통해 생성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며, 그에 의해서 개인은 공동체에 귀속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풍속은 한 사회의 모습을 잘 나타내 주는 다양한 색깔과도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마한의 풍속에 대한 기록은 매우 소략하지만 중국측 사서인 「삼국지」나 「후한서」에 대동소이한 내용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고고학적인 자료를 통해서 마한 풍속에 대한 기록을 확인할 수 있기도 하지만 그 모습을 유추할 수 있기도 하다.
먼저 일상생활에서 풍속을 살펴보면 “기강이 흐려서 각 나라의 도읍에는 비록 우두머리(主帥)가 있지만 읍락에 뒤섞여 살기 때문에 제대로 다스리지 못했다. 무릎을 굽혀 인사하는 예가 없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사실은 마한의 집자리 발굴조사를 통해서 보면 대규모의 취락에서 개별 집자리의 규모는 균등한 편이며, 특히 그 가운데에서 뚜렷하게 규모가 커서 지배자의 거처라 할 만한 것은 확인되지 않는다. 또한 출토유물을 보더라도 특정 집자리에서 뚜렷이 구별되는 권위의 상징인 위세품도 발견되지 않기 때문에 집단 내에서 서열화의 증거는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현상은 중국인의 눈에 비친 기록처럼 마한사회가 예의가 없고 무질서한 사회라기보다는 마한 사회의 특징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곧 농경을 생업으로 하는 혈연중심의 사회였기 때문에 지배와 피지배 관계라기보다는 서로 협동이 필요한 평등한 공동체 사회의 특징으로 볼 수 있다.
또한 “거처는 초가에 토실을 만들어 사는데, 그 모양은 마치 무덤과 같았으며 그 문은 윗부분에 있다. 온 집안 식구가 함께 살며 장유와 남녀의 구별이 없다. ”
이와 관련하여 고고학적인 발굴조사를 통해 많은 수의 구덩이 유구가 군집을 이루고 발견되고 있는데, 입구는 원형과 방형이 주를 이루고 그 폭은 1~2m이며, 깊이는 2~3m로서 다양하다. 특히 2001년 사적 제 433호로 지정된 공주 장선리 토실유적에서 39기가 발견되어 마한의 집자리 구조에 대한 논쟁이 촉발되었다. 그러나 이곳에서 출토되는 생활용 토기와 문헌기록을 토대로 마한인의 거처인 토실이라는 결론에 접근되고 있다. 전북지역에서는 익산 왕궁 사덕유적에서 마한에서 백제시대에 걸치는 집자리 105기와 토실유구 124기가 발견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토실은 계절적인 필요에 의해서 사용되었던 주거시설이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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