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의 땅에서 태어난 근본이라 그러했을까
천석꾼의 사위로 집 단속하며 누릴 일이지
일경을 두들겨 팬 19살 청년은
도쿄의 일왕 살해를 실패하고
북경의 동지들과 한솥죽을 끓이다
스승 우당의 암살범이자 밀정 찾아내
자백받고 교살하였다
떠나고 떠나 만난 의열단이 노선을 틀자
1.200km를 홀로 걸어 간 김구의 집에서
시야와 만주기지노선을 꿈꾸었고
상해 서쪽 철공장과 안공군이 내어준 점방에서
밤새 아이스크림을 저었고
전차 매표원으로 생계를 떠안은 그는
동지들의 가장이었다
홍구공원 천장절 경축식장 비는 내리고
기다리던 왕아초의 입장권은 끝내 오지 않았고
장내 윤봉길의 성공으로 그나마 안도했으나
터트리지 못한 또 하나의 도시락 폭탄이 있었으니
열사의 뇌관에 터진 절통함이여!
폭탄 두 개가 다 터졌더라면 역사는 좀 달라졌을까
겨드랑이에 과자 봉지처럼 도시락 폭탄을 끼고
땅콩을 까며 걷던 여여의 육삼정 앞
밀정은 투사보다 얼마나 더 많았던가
아리요시 공사 암살 계획도 밀고로
수포로 돌아가고 끝내 체포되어
“일본말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그 의의를
진술하는 데는 조선말과 비교할 수 없으므로 조선말
통역사를 입회시켜줄 것을 요구한다”
고 일본 판사를 매섭게 쏘아보던
그의 눈빛은 영원히 살아있으나
소외된 동지를 돌보다 전염된 폐결핵으로
조국의 독립보다 먼저 찾아와 빼앗긴
붉은 숨
유산이라곤 20년간 고향집 시렁에 먼지 쓰고 있던
일본어판 『세계사상대전집』몇 권
그마저도 일경이 불질러 버렸고
고단 여사가 보관한 편지 한 장이 전부라
독립된 조선 땅 어디든
무덤에 꽃 한 송이 놓아달라던
나가사키 형무소에 묻힌 유언대로
효창공원에 누우셨으니
그 간절함으로 스러져간 익명의 투사들이여!
그들의 후손들이여!
그리고 밀정의 후손들이여!
백만 년을 살아도 염치없는 아나키스트 나는
구파 백정기 의사의 장렬한 고독과
거칠고 거친 유랑을 견뎌 낸 뜨거운 심장에게
일천한 밀서 한 장 올린다.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의 해에 민족해방을 위해 헌신한 독립운동가를 기리는 시집/ 독립운동가 기림 시선1 <독립운동의 접두사> 민족문제연구소 민족문제연구회 엮음(2019)
백남이 시인은
서울 출생으로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2002년 시집 출간<사랑은 있다, 지금>으로 문단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 그는 한국작가회의, 민족문제연구소 민족문제연구회, 창작21작가회 등의 회원과 (사)평화의길 운영위원, 관동조선인학살 추모문화제 운영이사, (사)구파백정기의사기념사업회·연구소장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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