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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이장이 떴다] 함께 노래 부르고 음식 나눠먹고 ⋯ '팔순잔치' 동네가 들썩

최은주 할머니 생일에 동네 어르신들 모두 한자리 '웃음꽃'
"팔순 잔치에 초대합니다" 장소는 경로당⋯ 생일 노래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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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정마을 전경

청년 이장 4일 차인 지난 21일 동네 한 바퀴 돌기로 했습니다. 지난번 이사떡 돌리기 이후로 처음 둘러보는 마을입니다. 도시는 오전 10시면 시끌벅적하지만 화정마을은 꿈쩍도 않습니다. 날이 추워서인지 어르신들도 나오지 않고 골목길이 고요합니다.

아쉬운 마음을 안고 돌아가던 찰나에 경로당 앞 집에 소리가 나서 인사를 드리려다 젊은 여성 두 명과 마주쳤습니다. 청년 이장을 하면서 진짜 청년을 마주한 것은 처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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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진을 보자마자 먼저 키위부터 싸 주는 조재신 할머니. 문채연 기자

"어이구, 그대들 왔는가. 나는 저 사람들이 자네들인 줄 알고 여즉 이야기 듣고 있었네!"

집 주인인 조재신(89) 할머니가 나오셨습니다. 시골 마을인 화정마을에는 간간이 포교를 위해 젊은이들이 찾는다고 합니다. 대부분 사이비 종교에서 찾아오는 터라 곤란할 때가 많다는 게 할머니의 말씀입니다. 그래도 할머니가 젊은이들에게 커피를 내주는 이유는 좌우명 때문입니다.

'사람이 많으면 약이 된다.' 이것이 할머니의 좌우명입니다. 오는 사람은 막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할머니는 다 같은 사람이니 집에 오면 커피라도 주는 게 사람의 도리라고 생각하고 살았습니다. 시골마을 집까지 찾아와서 포교를 하는 것을 처음 접해본 청년 이장들은 적잖이 충격에 빠졌습니다. 지나가다 저희에게도 인사를 건넸거든요. 

아무튼 할머니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동네 할머니 집에서 커피를 마셔보는 일은 처음입니다. 진짜 이장이 된 듯했습니다. 할머니가 내 주신 맥심 커피는 달콤했습니다. 한 잔은 뜨거운 물에, 한 잔은 차가운 물에 타 오셔서 커피도 안 녹았지만 그래도 마음이 따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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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신 할머니가 지난해 강사의 도움을 받아 완성한 그림을 보여 주고 있다. 박현우 기자

"지금도 작은 소망이 있다면 그림은 또 배우고 싶네. 참 재미있었거든. 내가 언제 이런 걸 해 보겄어."

할머니와 '청년 이장' 취재진 2명은 뜨거운 장판 위에 앉아 이불을 덮고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할머니는 취미 부자입니다. 30여 년 전부터 써 온 일기는 수십 권의 역사 책이 됐고 방 한 칸에는 취미로 그린 유화 그림이 있었습니다. 아무것도 안 하면 쉽게 우울해진다고 생각한 할머니는 뭐라도 해 보고 싶었다고 합니다.

이전에 화정마을로 찾아온 강사로부터 그림을 배우긴 했지만 혼자서 하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지팡이 없이는 걷기 힘든 할머니는 그림을 배우러 나가기도, 그림 그리는 용품을 사기도 어렵습니다. 작은 시골 마을에서는 취미를 갖는 것도, 유지하기도 힘들다는 것입니다.

청년 이장들은 할머니의 소망을 수첩에 적었습니다. 언젠가는 이뤄 드리는 날이 오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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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주 할머니 팔순 잔치를 위해 경로당에 모인 마을 사람들의 신발.(이렇게 많은 신발이 있는 것은 처음입니다.) 박현우 기자

어김없이 오후 2시가 되니 또 경로당이 북적이기 시작합니다.

오늘은 최은주(80) 할머니의 팔순 잔치가 있는 날입니다. 떡, 통닭, 귤 등 음식을 잔뜩 준비해 오셨습니다. 취재진들도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습니다. 할머니는 방마다 돌아다니며 팍팍 먹으라며 성화입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과 생일 파티를 해 보는 것도 오랜만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다른 데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 같아 이장님께 여쭤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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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주 할머니 팔순 잔치를 축하하러 모인 마을 사람들이 순식간에 차려진 상에 앉아 맛있는 음식을 먹고 있다. 문채연 기자

"우리는 원래 이래요. 생일이면 다 같이 모여서 맛있는 것 먹어요. 각자 준비해서 오는 거지, 뭐. 생일 아니더라도 장보러 나갔다가, 병원 갔다가, 어디 지나가다가 맛있는 거 보이면 사서 같이 나눠 먹어요."

정말 신기한 일입니다. 한두 명도 아니고 수십 명에 달하는 마을 사람들이 자주 모여서 맛있는 음식을 나눠 먹고 같이 생일 파티를 한다니. 20대 취재진들은 팔순 잔치가 끝날 때까지 놀람의 연속이었습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사랑하는 최은주~ 생일 축하합니다."

이게 무슨 일일까요. 케이크도 없지만 상 위에 음식을 올려놓고 일단 같이 생일 축하 노래를 불렀습니다. 아주 어릴 적 친구들과 모여서 생일 파티를 했던 게 전부이다 보니 너무 놀랐습니다. 취재진들은 '아, 우리가 틀에 박힌 생각을 했던 건가?' 반성했습니다. 공동체를 잊고 살았나 봅니다. 오늘도 이렇게 하나 배워 갑니다. 할머니, 생신 축하합니다!

디지털뉴스부=문채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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