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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소명이라고 생각해요” 10년째 도내 장애가구에 행복 전달하는 오준규 사회복지사

제가 촬영한 가족사진을 받고 기뻐하는 장애가족의 모습을 상상하면 카메라를 내려놓을 수 없습니다. 각박한 사회에서 나눔을 실천하는 사람들의 행보는 세상을 따뜻하게 만든다. 전북에서 사회복지사와 사진작가로 21년째 활동하고 있는 전라북도장애인복지관 오준규 팀장(49)은 매주 토요일이면 카메라와 각종 촬영 장비를 챙겨 도내 곳곳의 장애인 가구를 돌아다니며 무료로 가족사진을 촬영해준다. 그의 선한 기부는 지난 2009년 우연히 방문했던 장애인 가정에서 출발했다. 오 팀장은 장애인 가정을 방문했는데 집안에 사진 한 장이 없는 거예요. 이유를 물어보니까 장애인 입장에서는 찍으러 가기도 힘들고 가더라도 발달장애인의 경우 촬영 자체가 힘드니까 사진을 찍을 수 없다고 하더라고요라며 그래서 사회복지사로서, 또 사진작가로서 이들을 위한 가족사진을 찍어줘야겠다고 생각했죠라고 말했다. 2009년 9월 네이버 해피빈 후원을 통해 50만원을 마련한 오 팀장은 조명과 천막 등 각종 촬영 장비를 마련했고 복지관을 이용하는 장애가정 10가구를 대상으로 첫 촬영을 시작했다. 첫 촬영이후 장애 가구들 사이에서 입소문이 퍼지면서 촬영 문의가 이어졌다. 그는 매주 주말이면 20㎏이 넘는 장비들을 차에 싣고 장애인 가구를 찾아나선다. 특히 2014년 고창 노부부의 가족사진 촬영 경험은 그의 착한 카메라 셔터를 10년이 넘은 현재까지 작동하게 하는 동기가 됐다. 고창에 있는 장애인복지시설에서 가족사진 촬영을 진행하고 있는데 할머니 한 분이 오전부터 찾아오셔서 우리 할아버지가 올 건데 사진을 부탁한다고 말씀해 기다렸다는 그는 오후가 넘어 촬영이 끝나가도 할아버지는 오지 않으셨다고 말했다. 할아버지께서 왜 오지 않으시는지 여쭤보자 할머니께서는 남편이 몸이 안 좋아서 그러는데 집으로 가서 촬영해주면 안되겠느냐고 부탁했고, 오 팀장은 장비를 챙겨 할머니 집으로 향했다. 알고 보니 이들 노부부는 어려운 형편에 결혼식도 치르지 못한 채 5평 남짓 쪽방에 살고 있었고, 할아버지는 뇌졸중으로 쓰러져 침대 생활을 하고 있었다. 오 팀장은 할머니는 그 동안 결혼 사진 한 장 없었던 아픔, 그리고 할아버지가 얼마 살지 못할 것이라는 불안감에 저희를 찾아와 부탁하신 것이었다며 함께 있던 직원이 할아버지를 일으켜 세워 등을 받치고 벽에 걸려있던 넥타이로 조명을 고정해 어렵게 노부부 사진을 촬영했는데, 두 분이 환하게 웃으시던 기억이 아직까지 제 뇌리에 남아 있다고 회상했다. 그의 재능기부로 현재까지 도내 1306 장애가구에 가족사진이 전달됐다. 매주 주말마다 카메라를 들고 나가는데 가족들의 배려와 응원이 없었으면 못했을 겁니다. 동시에 제 사진이 장애인 가구에게는 처음이자 마지막 사진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이 일을 멈출 수 없죠라는 그는 사진을 받고 기뻐하는 장애 가족들을 보는 보람 때문이라도 앞으로도 촬영을 계속할 겁니다라며 환하게 웃었다.

  • 사회일반
  • 엄승현
  • 2019.09.18 18:49

"숟가락 하나 더 놓는일…나누면 기분 좋아져요" 27년째 소외계층 위해 무료 봉사하는 박상권·김미선 부부

밥 묵고 가. 콩 한 쪽도 나눠 먹어야제~ 각박한 사회에서 나눔을 실천하는 사람들의 행보는 세상을 따뜻하게 만든다. 전주시 완산구 효자동에서 미용실을 운영하는 박상권(67)김미선(60여)씨 부부는 27년째 지역의 독거노인과 어르신, 장애인들을 위해 따뜻한 밥과 미용 재능기부를 이어가고 있다. 부부는 매일 아침 5시에 일어나 전주 남부시장에서 그날 어르신들과 장애인 등에 제공할 음식을 장만한다. 오전 7시, 아내 김씨가 미용실 문을 열면 남편 박씨는 음식 손질을 시작한다. 미용실을 10년 째 이용하고 있다는 김봉자씨(75여)는우리 같은 노인들을 위해 사장님이 3000원밖에 안 받는다며, 이곳에서 머리를 하고 나면 기분이 좋아진다고 했다. 오전 11시 50분께 손님 머리를 손질하던 김씨가 손님들에게 밥 먹고 합시다며 손님들에게 손짓했다. 이후 손님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미용실 가운을 두른 채 미용실 맞은편에 있는 이들 부부가 하는 무료급식소로 이동했다. 또 어디선가 나타난 어르신들과 장애인들까지 급식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곳에서 남편은 맛있게 드세요라며 이날 만든 나물과 풋고추, 동치밋국 등을 제공했다. 방문한 사람들 모두 식판에 음식을 담아 서로 담소를 나누며 식사하는 모습이 꼭 가족 같았다. 남편 박씨는그냥 좋아서 하는거에요. 어여 함께 밥 먹어요라며 주변 사람을 연신 챙겼다. 이들 부부의 선행은 과거 어려웠을 당시 주변들의 도움에서 시작됐다고 한다. 1992년 수원에서 남부럽지 않게 돈을 벌며 살던 이들 부부는 갑작스런 사업 실패로 어린 6남매를 데리고 봉고차 한 대에 의지한 채 전주로 이사 왔다. 보증금도 낼 돈도 없이 쪽방 하나 겨우 얻어 6남매와 함께 생계를 이어가던 부부는 이후 겨우 마련한 돈으로 효자동에서 작은 미용실을 차리게 된다. 그때 어려움을 어찌 다 이야기할 수 있겠어요. 애들은 배고파하고, 돈은 벌어야 하고 청소부터 안 해본 일이 없었습니다.(남편 박씨) 실력이 출중한 아내 덕에 미용실이 장사가 잘되기 시작했고, 이들 부부는 어려운 시절 도움을 줬던 이웃들에게 보답하고자 무료 급식을 운영 했다. 김씨는 밥은 혼자 먹는 것이 아니라 함께 먹는 것이다며 숟가락 하나 더 놓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 남편과 함께 이웃들에 무료 급식을 시작했고 나는 기술이 있어 미용 봉사를 했다고 설명했다. 65세 이상 어르신들에게 머리 커트 비용은 3000원, 염색과 파마는 각각 1만원과 1만 5000원이다. 이마저도 일부 어려운 이웃들에게는 무료이다. 급식소도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어르신과 장애인 등에 점심을 제공하고 있으며, 주말에는 반찬 등을 포장한 뒤 지역의 어려운 사람들을 찾아가 나누기도 한다. 부부의 선행은 최근 인터넷 등에서 소개되면서 전국에밥 주는 미용실라는 명칭과 함께 유명세를 탓다. 김씨는엊그제도 수원에서 젊은 관광객들이 머리를 하러 찾아왔다며 장수, 김제, 충남 등 어떻게 알았는지 손님들이 많이 찾아온다고 했다. 부부는봉사를 하면 기분이 좋아진다며,자녀들이 이제 나이도 있으니 건강을 챙기라고는 하지만 100살까지 건강이 허락하는 한 이웃과 함께하려 한다며 환하게 웃었다.

  • 사회일반
  • 엄승현
  • 2019.07.17 19:51

“힘들면 언제든지 연락해, 널 응원해” 거리에서 만난 학교 밖 청소년

힘들면 언제든지 연락해. 널 응원해. 우리가 징검다리가 돼 줄게 지난 4일 오후 7시 40분 전주시 완산구 고사동 중앙교회 광장. 학교 밖 청소년 상담, 징검다리라고 쓰인 현수막 2개가 임시천막 밖에 붙어 있었다. 천막 안에는 테이블과 플라스틱 의자가 놓여 있었고 테이블 위에는 간단한 빵과 과자, 물 등이 놓여 있었다. 테이블 한쪽에는 사복을 입은 전주완산경찰서 여성청소년계 소속 학교전담경찰관(SPO) 7명과 심리상담사, 변호사 등이 앉아 아이들을 기다렸다. 천막이 설치된지 얼마 되지 않아 한 학생이 상담천막 안으로 들어왔다. 이 학생은 부상으로 운동을 그만두고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라며 다른 아이들처럼 공부를 잘하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라고 속마음을 털어 놓았다. 이야기를 듣던 경찰관은 아직 안 해봐서 두려운 거야. 물론 지금 힘들고 괴롭겠지만 함께 차근차근 준비해보자. 아직 포기하지 말라고 위로했고, 이 말을 들은 학생은 해당 경찰관의 연락처를 받은 뒤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자리를 떠났다. 학생은 솔직히 방황도 했지만 이런 이야기를 듣고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며 경찰분에게 감사하다고 말했다. 오후 8시 10분께 한 여학생이 여성전담경찰관 앞에 앉았다. 이 학생은 저는 어려운 것도 힘든 것도 없어요라며 말문을 열었고 경찰관 역시 괜찮다며 학생에게 안부를 묻는 등의 대화를 이어나갔다. 10여 분이 흘렀을까. 학생은 본인의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부모님은 이혼했고 학생과 어머니는 7년이 넘는 동안 어렵게 생계를 이어갔다. 그러던 중 최근 학생은 어머니를 잃었고 현재 혼자서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못한 채 홀로 생활하고 있었다. 나이가 어려 아르바이트도 구할 수 없던 학생의 유일한 생계 수단은 어머니 앞으로 나오던 보조금 50만원이 전부였다. 하지만 50만원으로는 집세와 공과금 등을 제외하면 남는 돈이 없는 실정이며, 어머니가 세상에 없는 현재 그마저도 곧 끊길 위기에 처해있었다. 무덤덤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던 학생은 지금 뭐가 힘들고 그런 건 없어요라며 그런데 여유가 좀 생기게 되면 제가 좋아하는 수영도 하고 자격증도 따고 검정고시도 봐서 졸업장도 갖고 싶어요라고 조용히 말했다. 이야기를 들은 경찰은 괜찮아, 지금은 정신없겠지만 나중에라도 힘든 일이 있거나 도움이 필요하면 곁에 있으니 언제든지 연락해라며 학생을 안아줬다. 징검다리 천막은 학교 밖 청소년 뿐만 아니라 모든 청소년들에게 열린 공간이었다. 이날 2시간 여 동안 진행된 천막 상담에서는 학생들의 연애, 교우관계 상담부터 가출, 학교폭력 등 다양한 고민과 이야기가 오갔다. 유명렬 전담경찰관은 처음에 상담소를 설치했을때 상담이 잘 될 수 있을까 의문도 들었는데, 그건 기우였다며 오히려 아이들이 대화를 하려고 이곳을 찾는다. 그동안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대화할 기회와 장소를 주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싶은 생각에 되레 미안할 따름이라고 말했다. 지난 2월 21일 전주완산경찰서가 전북 최초로 학교 밖 청소년들을 위해 만든 야외 상담소 징검다리는 매주 목요일 오후 7시부터 9시까지 이곳에서 심리상담과 법률상담 등을 제공하고 있다. 청소년들은 상담 외에도 관심 분야와 적성에 맞는 프로그램을 매칭받고 경찰은 학생들이 학습과 진로 등을 계속 이어갈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있다. 현재까지 23명의 학교 밖 학생들이 도움을 받고 학업과 직업 훈련 등을 받는 중이다. 은희상 전주완산경찰서 여성청소년계장은 징검다리는 단순히 상담만 하는 것이 아닌 학교 밖 청소년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들을 찾아 주는 것이라며 항상 시민들 곁에 있는 경찰로서 학교 밖 청소년들에게 더욱 많은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교육부에 따르면 지난해 전국 청소년 학업중단자 현황은 총 5만 57명으로, 이 중 기타 사유로 학생 1만 1588명(23%)이 자퇴했고, 1만 1289명(23%)의 학생이 해외 출국으로 학업 면제를 받았다. 전북의 경우 지난해 1355명이 학업을 중단했으며, 유형별로는 기타 사유가 384명(28%), 학업 유예가 186명(14%). 부적응이 168명(12%) 등이었다.

  • 사회일반
  • 엄승현
  • 2019.07.07 16:33

이재성·임영숙 부부 “주민들에게 감사한 마음 전하고 싶어요”

각박한 사회에서 나보다 우리를 생각하는 사람들의 행보는 세상에 따뜻함을 전한다. 이재성(66)임영숙(59여) 부부는 지난 25년간 전주 완산구 서노송동에서 남북로이마트라는 슈퍼마켓을 운영해오고 있다. 원래 남원에서 서점을 운영했던 이들 부부는 서점 사업이 점차 쇠퇴하자 1994년 자녀들과 함께 전주로 이사를 오게 되었고 현재의 위치에서 슈퍼마켓을 시작해 선미촌의 굴곡진 세월과 함께 살아오고 있다. 남편 이 씨는 처음 왔을 때는 동네에 사람이 많아 장사가 잘됐다면서 특히 명절 기간에는 손님이 많아 집도 못 가고 장사만 했다고 설명했다. 이후 2004년도 성매매특별법 시행과 전주시의 도시재생 사업으로 많은 사람들이 거리를 떠나게 됐다. 주변에서도 장사가 안되니 부부에 떠날 것을 권유했지만 부부는 자식까지 키운 정든 동네를 떠날 수 없다며 계속해서 장사를 이어왔다. 그러다 이 씨는 평소 봉사활동을 하던 아내에게 우리가 살고 있던 동네에 감사함을 전달하기 위해 봉사할 것을 제안했고 이후 운영하던 슈퍼마켓의 절반을 비워 2017년 3월 8일 선미촌 무료 국수집을 시작하게 됐다. 부부는처음 시작할 때는 주변 사람들이 이상하게 봤다며 장사도 안 되는데 사심이 있어 무료 급식소를 운영하는 것이 아니냐고 많이 물어봤다고 말했다. 가게 매출의 일부와 가게에서 나온 폐지를 판 돈, 주변인들의 개인 후원과 도움 등으로 운영되는 이 무료 급식소는 처음 주민들의 불신을 받으면서 시작했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동네 번영회와 부녀회 등 주민들이 함께 만들어나가는 봉사의 장이 되었다. 아내 임 씨는솔직히 매주 수요일 목요일 무료급식을 운영하는 것이 쉽지는 않다며 우리 부부가 욕심만 챙겼다면 무료급식을 하지 않고 슈퍼 운영에 더 공을 들였겠지만 내가 살고 있는 이 동네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민 끝에 주민들과 함께 하는 무료급식소를 운영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들 부부의 소망은 앞으로도 동네 주민들과 함께 무료 급식소를 운영하면서 선미촌이 도시재생사업으로 새롭게 탈바꿈해 거리에 활력이 넘치기를 바라는 것이다.

  • 사회일반
  • 엄승현
  • 2019.04.10 19:59

“네가 살아있음에 우리는 감사해”…희귀병 앓는 열살 조바울 군

바울아 일어났어? 기자님이 우리 바울이 보니까 사랑스러운 아이라고 하네. 바울이가 이렇게 효자야. 엄마 아빠가 언제 신문에 나오겠어. 응원해준 사람들 보러 올해는 꼭 다시 걷자. 올해 10살이 된 조바울 군의 어머니 민종숙 씨가 연신 아들에게 말을 걸었다. 아들의 목소리나 움직임은 없었다. 자리에 누워 이따금씩 깜빡이는 바울이의 눈짓이 대답이었다. 그래도 부부는 기뻤다. 살아있음에, 이것만으로 충분히 감사했다. 전주에 사는 민종숙(48)조승홍(57) 씨 부부에게 바울이는 늦은 결혼 후 귀하게 얻은 아들이었다. 주변 가족 중 아픈 사람도 없었기에 희귀병은 딴 세상 일이었다. 그러나 바울이가 태어나면서부터 패혈증, 요로감염 등으로 수차례 수술을 하자 정밀 검사를 했다. 결과는 선천적인 미토콘드리아 근병증이었다. 단백질 효소 세포가 점점 파괴돼 체내 에너지를 생산하지 못하는 병으로, 뇌와 근육세포부터 장기까지 손상시키는 무서운 희귀성 질환이다. 바울이는 7살까지 손을 잡아주면 걸을 수 있을 정도로 건강했지만 3년 전부터 갑작스레 악화돼 현재는 고개도 가누지 못하고 물도 삼키지 못하는 상태가 됐다. 지난해 말 위루관을 삽입해 관을 통해 영양 섭취를 하고 있다. 이 병은 치료제도 없다. 발병 속도를 더디게 하는 약과 합병증 치료뿐이다. 그리고 누구든 걸릴 수 있었기에 무섭다. 평범한 가정의 삶은 180도로 바뀌었다. 큰 병원이 아니면 진료가 불가능해 매주 서울을 오갔다. 공기가 건조하거나 소화가 안되는 등 조금만 환경변화가 생겨도 큰 합병증으로 이어졌다. 노인 요양사였던 아버지 조승홍 씨는 바울이가 태어나면서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일용직을 다녔다. 매일이 위급상황인 바울이를 돌보기 위해선 도저히 규칙적인 직장을 다닐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 씨마저 건축현장에서 사고로 한쪽 다리에 이상이 왔다. 행정을 통해 긴급구조 형식으로 기초생활비를 지원 받았지만 이마저도 올해부터 끊겼다. 특별한 신체적 어려움이 없으니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민 씨는 정부에서 희귀병 환자를 위한 간병인은 지원을 해준다. 하지만 아이의 상태는 부모가 제일 잘 안다. 간병인도 힘들어서 두 시간을 못버틴다. 간병인이 아니라 적지만 보조금을 지원해주는 게 현실적이다고 말했다. 바울아 씩씩하게 잘 견디고 있어., 100원의 기적이 모여 생명이 되길. 얼마 전부터 바울이네 가족에게 전국에서 응원이 쏟아지고 있다. 카카오가 운영하는 온라인 기부코너 같이가치에 사연 알려지면서다. 사연을 읽은 독자가 응원 댓글만 달아도 회사 카카오가 대신 기부해주고, 독자들도 100원부터 자유롭게 기부할 수 있다. 현재 응원 댓글은 5500여 건에 달하고 기부금은 약 1200만 원이 모금됐다. 목표 모금액은 입원치료비와 의료기기 구입비 등을 고려해 2000만 원이다. 지난해 말부터 시작된 모금은 오는 23일까지 같이가치 사이트(https://together.kakao.com/fundraisings/58636)에서이어진다. 부부는 응원 댓글과 기부자, 도움을 준 바울이가 다니던 학교와 전북장애인복지관 관계자들에게 감사하다며 더불어 사는 사회의 따뜻함에 힘을 얻었고 앞으로 바울이와 함께 의지를 갖고 병을 이겨내 같은 병을 앓고 있는 환자 가족들에게 희망을 주고 싶다고 밝혔다.

  • 사회일반
  • 김보현
  • 2019.02.13 19:55

[당신과 함께 합니다] ① 서정 목사 "장애인 스스로 살아갈 힘 만들어줘야죠"

각박한 사회에서 나보다 우리를 생각하는 사람들의 행보는 더 소중하다. 기해년 새해를 맞아 전북일보가 연중기획으로 당신과 함께 하는 사람들, 당신 곁에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함께 해서 더 따뜻한 첫 번째 인물은 서정 목사다. 서정(68) 목사는 지난 26년간 장애인 자활자립에 매달려 왔다. 장수 장계면 명덕리에 위치한 벧엘마을은 서정 목사의 평생 꿈이 응축된 곳이다. 이곳은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경계가 없는 세계다. 장애인은 누군가에게 의존해야만 살 수 있는 비정상인으로 보는 사회적 편견을 깨고 싶었습니다. 1982년 사고로 휠체어와 한 몸이 된 그는 1986년 장애인 시설에 들어갔다. 당시 시설에서 근무생활하면서 느낀 건 맹목적인 돌봄 형태는 희망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그저 누군가가 주는 밥을 먹고 잠들며 생을 이어가는 게 최선인지 안타까웠다며 장애인이 자립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후 그는 시설에서 만난 평생의 동반자 정명화(61)씨 등과 함께 1992년 2월 경기도 하남시에서 장애인들의 자활자립선교를 목표로 하는 벧엘장애인농장을 세웠다. 왜 농사와 농장이었을까? 제가 가르쳐 줄 수 있었으니까요. 농민학교에서 강의했었을 만큼 농업에 대한 지식은 풍부했거든요. 그리고 무엇보다 흙을 밟고 생명을 키우는 게 장애인들의 건강상에도, 정서상에도 좋지 않겠습니까. 발달장애인과 노숙인 27명은 서 목사가 빌린 2000여 평 밭에서 비닐하우스 농사로 각종 채소를 심고 닭을 키웠다. 지원금 없이도 자급자족하거나 채소달걀을 매장에 납품하며 먹고 살았다. 주변에서 장애인은 일할 수도 혼자 살 수도 없다고 했던 시절, 장애인들이 제손으로 일을 하고 돈을 벌었던 시간이었다. 그러나 벧엘장애인농장은 1996년 장수로 터를 옮겼다. 하남시에 있던 농장이 가건물이라는 이유로 철거당한 탓이다. 임대가 아닌 자가소유의 땅이 있어야 흔들림 없는 터전을 만들 수 있다고 판단한 서 목사는 2000년 11만 평 임야가 있는 현재의 자리로 옮겨 뿌리 내렸다. 토짓값은 전국 교인들의 기부금으로 충당했다. 이동을 반복하면서 노숙인들과 가족이 있는 장애인들은 농장을 떠났고, 현재는 연고가 없는 발달 장애인 15명과 복지사직원도 10명이 함께 생활하고 있다. 시설 규모도 제법 커져 벧엘장애인의집과 농장, 벧엘장애인의교회 등으로 구성돼 있다. 이 농장은 지난해부터 농사를 중단한 상태다. 다른 지역에서 장애인 노동력 착취 논란이 일어 굳이 오해받을 필요가 없다는 판단에서다. 서 목사는 직원들이 주된 일을 하고 발달 장애인은 하루평균 2~4시간 자활과 재활의 목적으로 활동해 우리 농장은 문제가 없었지만 괜한 오해를 받기 싫었다고 밝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장애인 자활 필요성을 강조했다. 나이 든 부모가 다 큰 장애인 자식 데리고 목숨 끊는 일은 없어야하지 않겠습니까. 그는 부모가 나이 들어서 부양 능력은 떨어지는데 계속 자녀에 묶여 있으니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경우가 많다며 예산지원이 아니라 장애인도 자립하고, 장애인 가족도 부담을 더는 여건을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장애인 가족이 함께 살며 농사 짓고 농장을 운영하는 생활공동체 벧엘마을 조성을 진행하고 있다. 이를 위해 지난해 단체를 법인화했다. 장애인 자활을 위해서는 가정이 살아나야 합니다. 시설에서 장애인이 일을 하면 노동력 착취라고 하니 가족이 함께 농사를 짓는 겁니다. 자녀들은 부모님 일손을 돕다가 복지관에서 노는 거죠. 닭장에 달걀을 가지러 가면서 운동도 하고요. 가정 생계와 장애인 자녀의 복지자활을 동시에 이루는 농촌 장애인 생활공동체를 만드는 게 제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서정(68) 목사가 전북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벧엘장애인농장'의 건립 이념에 대해 말하고 있다. 조현욱

  • 사회
  • 김보현
  • 2019.01.01 00:05
사회섹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