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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칼럼] '제3의 눈' - 박범신

박범신(소설가·명지대교수)

티베트를 비롯한 히말라야 일대의 사원에 가면 사원꼭대기에 커다랗게 한개의 눈이 그려져 있는 걸 흔히 보게 된다. 기념품 가게에서도 이 외짝눈이 새겨진 T셔츠나 돌 등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사원 입구에서 쭉 찢어진 커다란 눈을 만나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기도 한다. 마치 숨기고싶은 내 오장육부를 투사하는 듯한 눈빛이다.

 

이 눈을 흔히 '제3의 눈'이라 부른다.

 

이는 영혼의 눈이다. 티베트에서의 전통적인 수행방법은 일반적으로 존재의 근원인 절대적 본성을 똑바로 보는 정견이 그 첫째이고, 정견을 확고히 다져 끊이지 않는 체험으로 다지는 명상이 그 둘째이며, 그러한 정견과 명상을 우리의 실재, 또는 현실적인 삶 전체와 합일시키는 행위가 그 셋째이다. '제3의 눈'이란 말할 것도 없이 정견을 위한 눈이다.

 

사람에겐 눈이 두개 있다.

 

좌우에 눈이 있는 것은 넓게 보자는 것보다 오히려 똑바로 보자는 뜻에 더 부합된다. 한쪽눈만 가지고선 아무래도 사물의 균형을 맞추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개의 눈이 있다고 해도 그것이 보는 것은 우리가 흔히 사실이라고 믿는 현상에 불과하다. 객관적 현상을 똑바로 보자는 사실주의적 세계관이 바로 이 두개의 눈에서 비롯된다.

 

그렇다면 현상은 곧 진실인가.

 

사실주의적 세계관의 문제는 진실이 항상 사실이나 현상과 완전히 부합되지 않는다는데 있다. 고약하게도 사람은 보는 데로만 알고 보는 데로만 느끼고 보는 데로만 삶을 운영하지 않는다. 사람은 두개의 눈으로 현상을 보지만 보이지 않는 ' 제3의 눈' 으로 현상 너머의 다른 본질을 또 본다. 그것이 사람이 동물과 다른 점이다. 거창하게 본성을 꿰뚫는 영혼의 눈이라고까지 갖다 붙일 것도 없다. 문화적 인간과 야만적 인간을 가르는 분기점이 되는 '제3의 눈'이란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기억의 눈과 상상력의 눈을 말하는 것이다.

 

사물을 볼 때 사람은 어떻게 보는가.

 

사람이 생물학적 시각으로 보는 것은 현상에 불과하지만 은밀한 내적 통로를 통하여 그는 그 현상을 현상으로만 보지않고 기억과 상상력을 보태어 해석한다. 이를테면 숲을 보면서 수목장이란 장례문화를 생각하고, 장례문화를 통해 오래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를 떠올리고, 아버지를 통해 평생 나무꾼이나 다름없이 살아온 아버지의 가난한 생애에 닿는다. 가난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또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도 그는 비로소 깨닫는다. 기억의 총체성을 부과해서 그는 숲을 보고 해석하는 셈이 된다. 그는 그것으로 인해 좌절하지 않고 더 열심히 뛸 수도 있다.

 

상상력도 마찬가지 힘을 발휘한다.

 

숲을 보고 자연의 원리를 상상할 수 있고 자연의 원리를 짚어 우주를 내다볼 수도 있다. 지구조차 떠날 수 없는 인간이 신을 찬양하고 더 나아가 스스로 신이 될 수도 있다고 믿는 것은 상상력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조건은 따져보면 식욕과 성욕조차 이길 수 없는 동물의 층위에 놓여있지만, 그와 동시에 신적인간에 이를 수 있을 만큼 그 층위가 넓은 것이 또한 사실이다. 어떤 이는 그 자신 부처가 된다. 인간이 지상에서 하늘까지 그토록 넓은 층위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은 기억과 상상력이라는 '제3의 눈'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각설하고.

 

단지 잘 먹고 잘 살자는 것은 오로지 생물학적 시각으로만 세상을 보고 자기 자신의 삶을 운영하는 것이 된다. 어떻게 잘 먹고 어떻게 잘살아야 하는가를 생각할 때 비로소 기억과 눈과 상상력의 눈이 작동한다. 짐승의 층위로부터 하늘의 층위에 이르기까지, 거의 무한대의 스펙트럼 앞에 존재하는 인간이 어떤 층위에다 자신의 삶은 내려놓을 것인가 하는 문제는 전적으로 기억과 상상력으로 요약되는 '제3의 눈'에 달려 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것이다.

 

우리가 세계에서 최상의 정보화 국가를 이룬다고 해도 이 모든 정보가 오히려 기억과 상상력을 도태시키거나 감금시키는 방향으로만 확장된다면 우리에겐 희망이 없다. '성공'이라고 부르는 '신화'도 마찬가지다. '제3의 눈'을 감금시키는 정보화나 성공은 우리를 다만 물질의 감옥 속에 가둘 뿐이다.

 

/박범신(소설가·명지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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