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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일은 존재의 의미…쓰러질 때까지 꿈꿀 것”

이길여 가천대 총장

▲ 이길여 가천대 총장이 시련과 역경을 두려워하지 않고 도전을 통해 발전을 추구하는 ‘바람개비 철학’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안봉주기자 bjahn@
일생을 꿈꾸고 도전 하는 삶. 누구나 다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가슴에 품었던 꿈이 실현되는 그 지점에서 또다시 새로운 꿈을 꾸고 다시 도전하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꿈을 실현하고 도전하는 과정에는 역경과 고난이 더 큰 무게로 실리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일생을 걸고 자신의 신념을 지키며 ‘간절히 꿈꾸고 뜨겁게 도전해온 사람’이 있다면 그의 ‘역사’가 궁금해질 수밖에 없다. 이길여 가천대 총장을 만났다. 의사로서 교육자로서 사업가로서 그가 걸어온 길은 장강(長江)과도 같이 깊고 넓다. 여성의 사회진출이 그야말로 높은 장벽이었던 시대, 그것도 농촌에서 태어나 오로지 자신의 힘으로 의사의 꿈을 실현한 그는 전 재산을 털어 만든 의료법인을 통해 종합병원과 여러 개의 전문병원을 만들어 선진 의료를 일구었다. 90년대 초반에는 재단법인 가천문화재단을 만들어 사회공헌과 나눔의 정신을 실천해왔으며 의과대학을 만들고 종합대(경원대)를 인수해 인재양성의 꿈을 실현해왔다. 그가 다시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다. 그동안 추진해온 가천의대와 경원대 통합이 지난 7월, 교육부로부터 승인을 받았다. 불가능한 일로만 여겨졌던 두 대학의 통합은 중단 없는 그의 도전정신이 이어낸 또 하나의 결실이다. 이 총장은 이 대학을 10년 안에 국내 10대 대학으로 만들겠다고 했다. 자신감이 넘쳐보였다. 인터뷰는 지난달 30일 경기도 성남의 가천대 경원캠퍼스 총장실에서 있었다. 빨간 재킷에 검정 바지를 차려입은 그는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로 젊어 보였다. 그러나 우리를 압도한 것은 외모보다도 시종일관 샘솟는 열정이었다.

 

 

-기대보다도 훨씬 더 젊으십니다. 늘 이렇게 넘치는 에너지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겉으로 드러나는 것으로만 젊다고 이야기할 수 없어요.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일을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하죠. 우선 어떤 일이든 육체적으로 빨리 빨리 대응할 수 있어야 해요. 아무래도 나이를 먹으면 천천히 일어나고 걸음걸이도 그렇고. 그런데 나는 아직 젊은이들하고 뛰어도 자신 있어요.”

 

 

-비결이 운동인가요.

 

“운동 많이 하죠. 하루도 빠짐없이 걷고, 밖에서 걸을 수 없으면 집에서 머신을 이용합니다. 저녁 시간을 많이 투자하죠. 주말은 어김없이 골프를 칩니다.”

 

 

-열정적으로 살아오신 총장님의 성공스토리는 많은 사람들에게 귀감입니다. 성공의 원동력이 궁금합니다.

 

“도전정신과 열정, 그리고 추진력이 아닐까요. 제게는 혼신의 힘을 다하면 꼭 이루어진다는 신념이 있습니다.”

 

 

-‘간절히 꿈꾸고 뜨겁게 도전하라’는 자서전의 제목이기도 하더군요. 꿈을 꾸는 일은 총장님 삶에서 어떤 의미인가요.

 

“꿈꾸는 일은 존재의 의미예요. 나에게 꿈은 항상 현재 진행형입니다. 이 세상에 사랑이 넘치게 하는 일, 병든 사람을 돌보고 나라를 떠받칠 젊은 인재를 길러내는 길을 찾는 것이지요.”

 

 

-어린 시절을 회상하면 가장 강하게 떠오르는 것이 있습니까.

 

“제가 말문이 늦게 터졌어요. 아들 대신 딸로 태어난 것도 그렇고 ‘미운 오리새끼’였죠. 어머니의 사랑으로 그 외로움을 극복했습니다. 학교에서는 ‘공부는 잘하는 아이였어요. 줄곧 1등을 했으니까요.”

 

 

-어머니에 대한 사랑과 기억이 각별하신 것 같습니다.

 

“어머니는 나의 전부였어요. 여자가 배워서 뭐하느냐는 집안 어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끝내 나를 가르치셨지요. 나는 어머니가 돌아가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어요. 내가 의사인데도. 그렇고 보면 사람이라는 것이 얼마나 맹점이 많은 겁니까. 어머니에 대한 사랑과 믿음과 의지가 그만큼 컸던 것 같아요. 돌아가신 순간, 세상을 다 잃은 것 같은 허전함은 말로 다 표현 할 수 없어요.”(어머니를 회상하면서 이 총장은 끝내 눈시울을 붉혔다. 이 총장은 집의 침실과 집무실 화장실에 어머니 사진을 걸어두고 늘 어린 시절로 돌아가 대화한다고 들려주었다.)

 

 

-시골 여학교에서 서울대 의대 진학이 쉽지 않았을텐데요. 특히 당시는 여성의 사회진출 벽이 높았지 않았습니까. 그 장벽을 어떻게 극복하셨나요.

 

“남보다 노력해야 얻을 수 있는 일들이었습니다. 다행히 직업이 의사이고 교육자여서 다른 분야보다 차별을 덜 느꼈던 것 같아요. 물론 나도 태어날 때부터 딸이라고 구박 많이 받았지요. 내 마음대로 여자가 된 것도 아닌데.(웃음) 여성의 사회진출은 예전보다 많이 나아졌지요. 그래도 남성들보다 노력해야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부족한 것을 채우려는 노력만이 길입니다.”

 

 

-그래도 힘들었던 시기가 있었을 텐데요.

 

“1960년대 의사 초년병 시절입니다. 환자 진료에 진력을 다했지만 약품 부족으로 환자가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해 사망하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어요. 의사가 없는 섬에 사는 주민들이 병원에 늦게 도착해 고귀한 생명을 잃었을 때도 참담했습니다. 그런 시기가 저에게는 가장 힘들었던 것 같아요.”

 

 

-산부인과는 왜 택하셨나요.

 

“60년대에는 여성들의 질병이 매우 심각했습니다. 아이를 낳다가 사망하는 여성들이 정말 많았죠. 여성으로서 여성들을 더 잘 보살펴야 한다는 생각을 당연히 했어요.”

 

 

-총장님 자서전에 바람개비 철학이 나오더군요.

 

“바람개비는 바람이 거셀수록 잘 돌아갑니다. 시련과 역경은 사람을 힘들게 하지만 이를 통해 발전하게 되지요. 도전과 시련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세가 항상 필요합니다.”

 

-그 도전정신이 일구어낸 결실이 참 많습니다. 최근에 통합을 이룬 가천대 이야기를 좀 해주시죠. 불가능한 일로 여겨졌던 두 개 대학 통합으로 많은 대학들이 주목하고 있습니다. 통합 과정에서 어려움도 많았었는데 통합을 해야 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습니까.

 

“이제 학령인구가 급격히 줄어든다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지금 대학들은 학령인구 100만 명 때에 생긴 학교들이에요. 그런데 이제 50만 명 40만 명으로 떨어지면 학교도 구조조정을 해야죠. 좋은 인재양성을 위해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 학교는 이미 통합의 경험이 있어요. 경원전문대와 경원대 통합, 가천전문대와 가천의대 통합이 그것이죠.”

 

 

-그러니까 4개 대학을 합한 셈이군요.

 

“그런 셈입니다. 사실 이들 대학 통합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감이 와 닿지 않을 겁니다. 모두 불가능한 일이라고 했거든요. 그런데 저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불가능한 일을 가능한 일로 만드는 일이 의미 있는 일이지 가능한 일은 누구나 한다고. 저는 평생을 그런 생각으로 살아왔어요.”

 

 

-자료를 보니까 규모로는 수도권 3위던데요.

 

“그것은 별로 내세우고 싶지 않습니다. 규모가 중요한 것은 아니니까요. 얼마나 좋은 인재를 많이 키워내느냐가 중요하죠. 교수들에게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학교인프라는 다 구축해 줄 터이니 좋은 교육으로 인재만 만들어달라구요.”

 

 

-10년 안에 국내 10위권 명문을 만들겠다는 계획은 자신 있습니까.

 

“물론입니다. 총장은 총장대로 교수들은 교수대로 자기가 맡은 일을 열심히 해내면 당연히 이루어진다고 생각합니다. 두 대학이 합쳤으니 시너지는 극대화 될 겁니다. 의생명 약학 보건 분야의 특성화대학과 인문.사회과학, 공학, 예술 분야가 강한 대학의 통합이니까요. 저는 이번 통합으로 우리 대학이 글로벌 대학으로 도약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고 자부합니다. 성남 경원캠퍼스는 글로벌캠퍼스로, 인천과 강화는 메디컬 특화 캠퍼스로 육성할 계획입니다.”

 

 

-교수 채용에 매우 적극적이시라고 들었습니다. 인재를 등용할 때 무엇을 우선 보십니까.

 

“능력이죠. 그리고 지식과 인품이에요. 교수의 경우는 첫째 학생들에게 주어야 할 학식이 많아야 해요. 학생들을 사랑하고 학생을 위해 얼마나 희생할 수 있는가를 봅니다. 학벌이 우선 조건은 아녜요. 아! 우리 대학이 여자교수가 가장 많다고 하던데요.”

 

 

-총장님께서 의도하신 결과입니까.

 

“아녜요. 능력으로 유능한 사람 뽑다보니까 그렇게 많아진 겁니다. 성별을 안 보았거든요.(웃음) 그런 점에서 보면 여성들이 뛰어난 것 같아요.”

 

 

-늘 궁금했던 것이 있습니다. 사회를 변화시키고 발전시키는 일에 앞장서 오시면서 정계 입문을 권유받으셨을 것 같습니다만.

 

“그런 권유가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요. 정치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하고 싶었어요. 내가 좋아하는 것은 환자를 돌보는 일이고, 인재를 키워내는 것이에요. 나에게 이것보다 더 행복하고 좋은 것은 없습니다. 그런 생각이었어요. 무슨 큰 뜻이 있었던 것이 아니고.”

 

 

-앞으로도 실현하고 싶은 꿈이 있습니까.

 

“그럼요. 나는 쓰러질 때까지 꿈을 꿉니다. 우리 재단이 어떻게 하면 잘 발전하고 최고의 인재를 키워낼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우리 병원에서 환자들이 행복하게 진료 받고 나갈 수 있을까를 생각합니다. 그 답은 곧 꿈이 됩니다. 사실 꿈을 꾸는 것은 산을 오르는 일과 같아요. 나는 한없이 산을 오르고 있지요. 산을 오르다 보면 돌멩이에 걸려 넘어질 수 있고, 나뭇가지에 걸려 할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올라가죠. 그 끝은 어디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답합니다. 그 끝은 없다고. 내가 가다가 내가 끊어지면 그 다음 사람이 올라갈 것이라고요.”

 

 

-혹시 평생을 독신으로 살아오신 것에 후회는 없습니까.

 

“후회는 없어요. 저는 다시 태어나도 여자로 태어나고 싶습니다. 결혼도 안할 것이고, 또 이 길을 택할 겁니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걸어온 바로 이 길을요.”

 

 

-6개의 병원, 언론사, 대학, 박물관 등 의료 교육 문화재단을 통한 사회에 공헌 활동이 경이롭습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모범적인 실천이 아닐까 싶습니다. 후대에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으신지요.

 

“회장이니 총장, 이사장 등 세속적인 타이틀보다 ‘사랑의 메신저’ ‘어려운 사람을 돕는 봉사자’ 혹은 ‘젊은이들의 멘토’로 기억되고 싶습니다.”

 

 

인터뷰 도중 안철수 교수의 기부가 화두에 올랐다. 그는 “나도 그런 생각을 갖고 있었는데 ‘그 양반이 먼저 했더라’며 참 좋은 일 아니냐”고 반문했다. 그는 이미 전 재산을 법인화해 놓았으니 사실상 사회에 환원한 셈이다. 그런데도 그는 아직 사회에 환원할 것이 많이 남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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