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진 시인 '장소와 장소상실' 서평
'또따또가'가 있는 중앙동과 동광동 일대는 '동광동인쇄골목', '자갈치시장', '광복동패션거리', '창선동먹자골목' 등 의미 있는 공간이 주변에 연결되어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부산의 중앙동과 동광동이 예전부터 문화예술인이 즐겨 찾고 놀던 '장소'였다는 점이다.
'공간(space)'과 '장소(place)'를 연구한 대표적인 인문지리학자가 이푸 투안과 에드워드 렐프다. 투안은 공간과 장소를 명확히 구분했다.
공간과 장소가 다르게 인식되는 기준은 '경험'이다. 인간은 직·간접적인 경험을 통해 '미지의 공간'을 '친밀한 장소'로 바꾸어 인식하게 된다. 렐프가 장소와 관련해 연구한 성과물은 '장소와 장소상실'(논형·2005)에 담겨 있다. 렐프는 '장소 정체성'(identity of place)으로 장소를 설명한다.
렐프는 장소정체성을 "장소와 장소경험의 주체인 사람 사이의 상호관계를 통해 만들어지는, 장소의 고유한 특성"라고 정의했다. 장소정체성은 '물리적 환경', '인간 활동', '의미' 등으로 구성된다고 보고 어느 하나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고 여겼다.
렐프의 이론은 특히 경관(landscape)을 분석할 때 의미가 있다. 그는 '진정성(authenticity)'으로 경관과 장소를 분석했는데, 진정성도 역시 현상학적 개념이다.
트릴링(L. Trilling)이 말했던 '진실성(sincerity)'에 가까운 것으로서 하이데거 언급을 빌어 렐프는 "자기 실존에 대한 자유와 책임을 인식할 수 있는 상태로 장소와 관계를 맺는 것"이라고 했다. 능동적이며 자유로운 상태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곳이 진정한 장소란 뜻이다.
현대경관을 '진정한 장소감을 주는 곳'과 '비진정한 장소감을 주는 곳'으로 나누었다.
그렇다면 전주한옥마을과 동문거리는 어떤 장소감을 주는 곳일까.
근래의 모습은 '비진정한 장소감'을 준다. 짧은 시간에 낯선 경관 요소가 너무 많이 들어섰다. '오일주장'이나 '삼백년가', '조약국'과 같이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익숙하고 의미 있는 장소들이 하나 둘 없어졌다.
그 빈 자리에 시멘트블록으로 벽을 쌓은 이상한 한옥이나 유럽에서나 볼 수 있는 돌길로 채워졌다. 그 많은 길 중에 왜 하필이면 돌길인가. 오목대로 통하는 골목길을 없애고 굳이 나무로 등산로를 만들어야 했을까. 한옥마을과 동문거리는 20여 년 동안 '실존적'으로 관계를 맺었던 의미 있는 공간이다.
'새벽강'이란 술집에서 수많은 예술가들을 만났고 '동문사거리수퍼'에서 담배를 샀다. '풍전콩나물국밥집'에서 해장을 했으며 가끔 '삼양다방'에서 다방커피를 마셨다.
'산조예술제'가 치러질 때 한옥마을 골목을 누비고 다녔고 전주향교·경기전은 주로 이용하는 산책로였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한옥마을·동문사거리는 필자에게 '진정한 장소감'을 주는 곳이었다.
21세기 관광여행의 경향은 '의미를 주는 여행', 즉 장소감을 소비하는 관광이다. 한옥마을 일대의 장소성은 약 100여 년을 통과하며 역사적으로 쌓인 귀중한 유산이다. 전주시는 그런 장소성을 없애고 새로운 경관을 만들고 있는 셈이다.
문득 현재의 한옥마을과 동문거리가 여행자들에게 어떤 장소감을 줄지 궁금하다. 기억해야 할 것은 그들에게 의미와 친숙함을 주지 못한다면 다시는 찾지 않을 것이라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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