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뒤 아내 권유로 이탈리아 유학길 / 수리 아닌 제작 전문 공방 익산에 열어 / "부끄럽지 않은 악기 세상에 내놓을 것"
명기(名器)는 모든 현악기 연주자의 꿈이다. 연주자들은 자신의 음악성을 한껏 발휘하게 해줄 ‘천생연분’의 명기를 만나기 위해 평생을 찾아 헤맨다. 대당 수억 원, 수십억 원을 호가한다는 바이올린과 첼로는 누가 어떻게 만들까.
익산 구도심 한복판인 중앙동에는 수제 현악기 공방을 운영하는 이문태 씨(42)가 있다.
작은 도시 익산에서 바이올린, 첼로, 비올라를 직접 만드는 사람이라. 신기하고 낯선 풍경이었지만 벌써 5년째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꽁지머리를 질끈 묶고 작업복을 입은 범상치 않은 외모를 가진 그의 옆에는 청순한 아내 심은희 씨(42)가 있다.
동갑내기 부부. 이들의 만남부터가 범상치 않다. 초등학교 동창인 부부는 풋사랑, 첫사랑의 인연으로 결혼까지 골인한 이 시대에서 보기 드문 순정 로맨스의 주인공이다.
아내 심은희 씨는 바이올린 전공자다. 성인이 되어 두 사람은 실내 건축가와 음악가로 다시 만나 사랑의 결실을 맺는다.
음악과는 전혀 무관한 삶을 살고 있던 이문태 씨에게 어느 날 아내가 제안을 한다.
“건축과를 나온 남편의 손재주가 남달랐어요. 섬세하고 꼼꼼하고 결혼해서 살면서 보면 볼수록 재주가 아깝고 다르게 살 수도 있겠구나 싶어 제가 먼저 악기 제작을 공부해 볼 생각이 없냐고 던졌죠.”
이에 이문태 씨는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아내와 한 살, 두 살의 두 아들을 뒤로 하고 이탈리아 크레모나(Cremona)로 유학길에 올랐다. 지난 2005년 이 씨는 I.P.I.A.L.L(Cremona international violin making school, 국제현악기수공전문학교)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유학생활만 4년. 남들은 직장과 가정에서 안정적인 기반을 잡아갈 때 이들 부부는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다.
“겁도 났죠. 공대를 나온 제가 음악으로 전공을 바꾼 거잖아요. 아내의 전폭적인 지지가 없었다면 못해냈을 겁니다.”
어린 아이들과 한국에서의 생활은 전적으로 아내의 몫이었다. 레슨을 하며 생활을 책임져야 했다. 이런 아내의 고생을 알기에 이문태 씨는 유학생활을 게을리 할 수 없었다. 가족을 생각하며 죽을 만큼 열심히 했다. 또 그는 악기를 깎고 칠하고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희열을 느끼며 ‘이제야 천직을 찾았구나’ 라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행복하게 유학생활을 마칠 수 있었다.
“어린 아이들을 키우랴 레슨하랴 저도 힘들었지만 이상하게 고된 줄 모르겠더라구요. 제가 보기에남편은 천부적인 재능이 있어요. 저는 노력파거든요. 그런데 남편은 타고 났다는 걸 느껴요. 그래서 제가 남편을 밀어준거죠.”
방학이면 제작한 악기를 한국에 들고 와서 팔아 유학비를 충당하던 시절이지만 돌아보면 힘들기보다 행복했던 기억만 있다는 부부다.
이탈리아에서 한국으로 돌아온 이문태 씨는 서울에서 일하자는 제의를 많이 받았다. 그러나 그는 익산에 공방을 열었다. 수제 악기의 수요 대부분이 대도시에 집중된 현실에서 그의 선택은 주변 사람들을 의아하게 했다.
하지만 부부가 지닌 삶의 가치관은 확실했다.
“서울에서 일하다보면 악기 제작보다는 쉽게 돈을 벌 수 있는 악기 수리를 많이 할 것 같았어요. 악기 수리도 나름 매력 있지만 수제 악기를 만들기 위해 어렵게 공부했는데, 제작에만 몰두하고 싶었어요.”
방해받지 않고 악기 제작을 하고 싶다는 그의 고집은 아내의 지지가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천생연분인 부부는 가치관도 같았다.
이문태 씨가 제작하는 악기는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로 대부분의 판매는 서울에서 이뤄진다.
“만드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돈을 많이 버는 것보다 악기가 소리를 잘 냈으면 하는 소망이 더 커요. 그래서 좋은 연주자라면 악기를 공짜로 줄 수도 있어요.”
돈에 욕심이 없다는 남편의 말에 아내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다. 이들 부부는 음악에 대한 자존심이 많이 닮아 있다.
수제 악기다 보니 거의 대부분 주문 제작으로 진행된다. 간혹 비싸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악기 한 대를 제작하는 데 보통 3개월이 걸리고 1년을 넘게 말려야 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시간과 정성을 생각한다면 비싸다고만 할 수는 없다.
아내를 위해 ‘세상에서 하나 밖에 없는 바이올린’을 만든 남편. 그 악기로 아름다운 음악을 세상에 연주하는 아내. 이들은 보물인 세 아들 건·준·범의 자랑스러운 부모로서, 음악과 현악기를 사랑하는 장인으로 부끄럽지 않은 악기를 세상에 내놓을 것이다. 세월이 흐를수록 그 소리는 더 묵고 진한 울림을 만드리라 믿는다.
■ 최고의 바이올린 제작자 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
역사상 최고의 바이올린 제작자로 알려진 사람은 이탈리아의 현악기 장인 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Antonio Stradivari, 1644 - 173
7)다. 스트라디바리는 이탈리아 밀라노 공국 크레모나(Cremona)에서 출생했고 바이올린 명기의 대명사적 존재이며 현재 표준형 바이올린의 창시자다.
그가 만든 악기들은 그의 라틴어 이름인 ‘스트라디바리우스’로 불리기도 한다.
그의 악기는 모양과 색채가 아름다우며, 음색이 매우 풍부하고 화려하기로 유명하다. 그는 93세까지 1000개가 넘는 악기를 만들었는데 그 중 바이올린 540개, 비올라 12개, 첼로 50개가 남아 있으며, 기타와 하프가 각각 3개, 비올라 다모레가 1개 정도 전해진다.
특히 1710년 이후의 제품은 가장 훌륭한 악기로 평판이 높다. 이 시기에 제작한 바이올린은 악기의 각 부분에 단풍나무, 등나무, 버드나무 등의 재료를 썼으며, 400년이 지난 지금도 스트라디바리의 바이올린은 수억 원대의 고가로 호가되고 있다. 지난 2006년 미국 뉴욕서 열린 크리스티 경매에서는 그의 바이올린 ‘더 해머’가 354만 달러, 현재 우리 돈으로 41억 원이라는 가격에 팔릴 정도로 세계 최고의 바이올린으로 자리 매김하고 있다.
그의 바이올린은 명바이올린 연주자들에게 애호되고 있으며, 이런 것들은 이전 소유자의 이름을 따서 ‘파기니니’, ‘뷔탄’, ‘비오티’, ‘슈브와’ 등의 이름이 붙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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