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청년에게 필요한 건 소소한 일상을 얘기 하는 자리를 마련하는 게 먼저
최근 친한 친구의 아버지 장례식장에 다녀왔다. 쌍둥이 남매여서 또 친한 동네 친구들이 많아서 그런지 문상을 또래가 많이 오게 되었다. 청년들과 활동을 자주 해서 그런지 나이를 잊고 지냈는데, 비슷한 나이의 사람들을 보니 내가 이정도 나이가 되었구나 하고 실감도 했다. 뭐 그런 마음보다는 활동 위주로 사람들을 만나고 지냈던 나로서 거의 8~9년 만에 보는 친구들이라 반가움이 무척 컸다.
둘째 날 오기로 약속한 친구들과 달리 첫째 날 혼자 와서 그런지, 너무 오랜만에 봐서 반가워서 그런지 상을 당한 친구가 문상을 온 나를 챙기며, 엉덩이를 토닥거리며 잘 지냈는지 묻는다. 먼저 도착해서 상차림을 도와주는 친구들과는 틈틈이, 8~9년전 생일파티 때 같이 재밌게 지냈던 추억, 서울에서 오순도순 지냈던 이야기, 지금 사는 이야기들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이야기를 하며 문득, 지금보다 단단하지 못했던 20대 시절, 민주주의니, 사회활동이니 몰랐던 그 시절, 나를 지켜줬던 것들은 정치, 종교, 공동체, 복지 그런 것들이 아니라, 그저 지금 만난 친구들이 주었던 위안, 격려, 대화등 일상의 소소한 것들이었다. 마치 식물의 생장에 걸 맞는 환경이 필요하듯이 그 시절 나에게 걸 맞는 환경을 친구들이 제공해 준 셈이다. 서른 여섯이란 나이에 비로소 친구의 소중함을 깨달은 것 같아서 한편으로는 부끄럽고, 한편으로는 기쁘다.
이런 생각을 가지면서 지금의 사회 활동을 고민하게도 되었다. 30대 후반으로 가고 있는 내가 생각하는 청년에게 필요한 것 말고, 지금 20대인 청년들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나의 지금을 있게 해준 것이 어린 시절 또래가 준 소소것들 이듯이, 지금의 청년들에게 필요한 것도 소소한 것이 아닐까? 내가 그 시절 가지고 있었으나, 지금은 결핍된 것이 무엇일까? 정치, 사회, 경제는 바라봐야 하는 가치이지, 문제를 바라보기 위해서는 작은 것을 살펴야 하지 않을까? 이렇게 평소보다는 조금 다른 생각들을 하게 되었다.
주변에 앞으로의 진로를 고민하는 청년들이 제법 있다. 지금의 길은 가자니 너무 답답하고, 다른 길은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이런 고민에 ‘아직 잘 몰라서 그래.’, ‘이런 것 해보는 것 어때?’등 상대의 경험이 쌓이지 않음을 지적하거나, 조금 더 경험이 있다는 착각에 다른 권유를 하는 나를 바라 본다. 그 친구들한테 필요한 것은 그런 경험적 지식이 아니라, 그저 지금의 불안과 결핍된 환경을 채워 줄 수 있는 것들이 아닐까? 식물이 환경만 갖추어지면 알아서 원하는 대로 잘 자라듯이 그 친구들을 불안하게 하는 환경만 개선되면 알아서 꿈을 찾고 키워 나가지 않을까?
지금 청년에게 필요한 것은, 이런 소소한 일상을 이야기 하는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 먼저이지 않나 싶다. 사회는 청년이 어떤 환경에 쳐했는지도 가늠하지도 못하고 있고, 저변에 깔린 환경을 바라보려면 이러한 일상의 내용들을 쌓여야만 한다. 일상에서 겪는 공통된 문제가 세대의 문제일 것이고, 그 세대를 바라 볼 수 있는 좋은 지표가 될 것이다.
아울러, 상대가 처한 환경을 주시하기 위해서는 상대의 삶 자체를 바라봐야 한다. 상대가 가진 가치는 삶의 지향점이지 삶이 아니다. 삶을 보려면 상대의 일상을 참조해야 한다. 그래야 일상을 참조해서 환경을 개선할 수 있다. 서로의 문제 해결을 위해 우린 지금 서로의 일상을 나누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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