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어붙은 냇물과 자갈밭에서는 사내아이들과 남자 어른들이 어울리며 연날리기가 한창이었다. 연 날리는 패들은 쇠전 강변 언저리로부터, 매곡교를 지나 전주교가 가로 걸린 초록바우 동천에 이르기까지 가득하였다. 까마득한 청람(靑藍)의 겨울 하늘 꼭대기에서 감감하게 떠다니는 연들은 흡사 꽃잎들 같았다” 1986년 『전통문화』 2월호에 연재된 최명희(1947~1998)의 미완 소설 『제망매가』의 내용이다. 최명희 작가가 묘사했듯이 연날리기는 이맘때쯤 즐겼던 대표 민속놀이로 한지에 대나무 살을 덧댄 연과 감치(유리를 곱게 빻아 풀에 갠)먹인 연실이 감긴 얼레를 신바람 나게 들고 뛰어나가 동네 어귀 둑방이나 언덕에 올라 연날리기를 했다. 아이뿐 아니라 어른들도 정월 초하루부터 대보름까지 그해의 재앙을 연에 실어 날려 보내고 복을 맞는다는 의미로 “송액(送厄) 혹은 “송액영복(送厄迎福)”이라는 액막이글이나 자신들의 이름과 생년월일시를 연에 써서 하늘 높이 날린 다음 연줄을 끊어 멀리 날려 보냈다.
대보름 이후에는 더는 연을 날리지 않았고, 그 이후에 연을 날리는 사람을 보면 ‘고리백정’ 혹은 ‘백정’이라고 놀렸다. 거기에는 연날리기를 좋아했던 영조임금의 이야기가 있다. 영조는 몸소 연날리기를 즐겨하며 대신들에게 연날리기를 권유했었다. 그러다 보니 연날리기가 온 나라에 크게 유행하여 글공부를 소홀히 하는 선비들과 연 날리는 재미에 빠져 농사일을 게을리하는 농부들이 생겼다 한다. 이를 크게 걱정하던 영조는 정월 대보름까지만 연을 날리도록 하고, 이를 어기면 ‘백정’이라 부르라는 영을 내렸다. 그 이후에는 가장 천한 사람으로 취급받던 백정으로 불리는 것을 꺼려 정월 대보름날 마지막 ‘액막이연’을 날리고 연을 날리지 않게 되었다. 다가오는 농사철을 대비하고 본업에 충실하라는 임금의 명이 풍습이 되어 연날리기는 농한기 겨울철 놀이가 된 것이다.
연은 오랫동안 인류 문화 깊숙이 자리 잡은 것으로, 초창기에는 주로 군사적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서양에서는 BC400년대에 그리스의 수학자이자 장군인 아르키타스(Archytas)가 새 모양의 나뭇조각을 날린 것이 서양 연의 기원이라 하며, 동양에서는 BC200년경 중국 한나라의 장군 한신(韓信)이 연을 높이 띄워 적의 움직임을 살폈다는 것이 고승(高承)의 『사물기원(事物起源)』에 기록되어 있다. 우리나라에는 《장천1호고분》’에 새 모양의 연을 날리는 모습으로 추정되는 5세기경의 고구려 벽화가 있고,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반란군을 토벌한 김유신이 군사적 목적으로 연을 날렸다는 최초의 기록이 있다. 647년 신라 진덕여왕 즉위에 반발하여 반란이 일어날 당시 별똥이 떨어져 군사들이 두려워하고 사기가 떨어지자 김유신이 불을 붙인 허수아비를 연에 달아 하늘로 띄워 “어제 저녁에 떨어진 별이 하늘로 다시 올라갔으니 진덕여왕이 승리할 것”이라 소문을 내어 진압군의 사기를 높이고 반대로 반란군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심리전으로 반란군을 이겼다는 것이다.
『동국세시기』에는 고려 말엽 최영 장군이 탐라(제주도)에 목호(목축을 하는 몽고사람)의 반란을 평정했을 때 연을 이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사방이 절벽인 곳에 상륙할 수 없자 최영 장군이 꾀를 내어 군사를 커다란 연에 매달아 병선(兵船)에서 띄웠다고도 하고 불덩이를 매단 연을 날려 보내 불을 내어 혼란해진 틈을 타 점령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조선 세종 때 남이 장군이 강화도에서 연을 즐겨 날렸다 하고, 임진왜란 때는 이순신 장군이 섬과 육지, 병선과 병선으로 연락하는 수단으로 연의 문양에 따라 명령을 달리한 신호연을 사용했다고 한다. 왜적에 맞선 조선 수군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일 수 있던 비결이 바로 ‘충무연’이라 불린 전술연 덕분이었다.
군사적 목적 외에 놀이로서의 연은 조선 중기부터 성황을 이루었다. 연은 한자로 ‘솔개연(鳶)’자를 쓰는데 솔개가 하늘에서 날개를 펴고 빙빙 도는 모습이 마치 연과 같아 주로 종이솔개인 지연(紙鳶)으로 표기하였으나, 연이 나는 모습을 딴 풍연(風鳶), 방연(放鳶)과 바람에 날리는 연의 소리가 거문고 소리와 비슷하다 칭한 풍쟁(風箏) 등 부르는 이름이 많았다. 연은 대나무와 한지를 이용하여 다양한 모양으로 만들었는데 주로 방패연, 꼬리연의 형태였고 갖가지 문양을 그려 넣었다. 연실은 주로 황사(누런실)나 면사(무명실)를 많이 사용했고, 가장 가볍고 질긴 백사(명주실)는 신분이 높은 계층에서만 사용했다. 연실을 감는 기구인 얼레의 명칭은 고거, 선거, 낙거, 자새, 거확, 추, 실패 등 연줄을 감은 얼레의 중요한 역할에 따라 다양하게 불리었는데 함경도 충청도에서는 연자새, 황해도 일부에서는 연패라고 불렀다 한다.
연은 만드는 기술 못지않게 날리는 솜씨가 중요한데 특히 ‘연싸움’에서 중요하다. 연을 높이 날려 재주를 부리며 서로 얼려 연 끊어먹기를 하는 것으로 날리는 사람의 손놀림에 따라 공중곡예를 부리며 승패가 갈렸다. 흔히 붙임성이 좋은 사람을 보고 ‘넉살 좋다’라 하는데 이 말은 연을 잘 날리던 강화사람에서 유래되었다. 연날리기 대회에 참가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5개짜리 연살로 만든 연으로 참가했는데 강화도 사람은 4개짜리 연살로 연을 날렸다고 한다. 바람이 강한 강화도에서는 허릿달(연의 허리에 붙이는 대)이 없는 연을 쓰는데 그 살이 4개인 연을 넉살이라 불렀다. 한 개의 살이 부족한데도 연싸움에서 승률이 높아 ‘넉살 강화연 좋다’라는 말이 나왔고, 이것이 나중에 ‘넉살 좋다’라는 말로 쓰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구름같이 많은 사람들이 모여 지역대표를 뽑아 팔도 연날리기 대회를 했던 시절도, 최명희 작가의 글 속 연날리는 사람들로 붐볐던 전주천변도 이제는 옛 기억으로 남았다. 게다가 연 대신 드론을 하늘에 날리는 세상이 되다 보니 아이들이 더러 날리는 연을 제외하고는 김제 지평선 축제 등 전통문화 체험장에서나 대규모로 날리는 연을 볼 수 있게 되었다. 돌아오는 대보름 즈음에도 각 지역의 연날리기 명소에서 연날리기 행사와 대회가 개최된다. 굳이 대회가 아니더라도 송액영복(送厄迎福)을 빌고 창공을 드높게 비상하는 연에 새해의 소망을 실어 하늘 높이 날려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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