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새벽,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애국가와 함께 어둠 속을 달리는 한 사람. 그는 나이지리아에서 온 오스틴 우다바(52) 씨다. 제주도의 서쪽 끝, 모슬포에서 제주시 함덕까지 새벽에도 족히 한 시간을 달려야 도착하는 건설 현장이 그의 일터. 벌써 3년 넘게 현장에 가장 먼저 도착하는 부지런한 일꾼이다. 늘 웃는 얼굴에 쾌활한 성격, 그래서 건설 현장에서 사귄 형, 동생도 많아서 여기저기 그를 부른다. ‘헤이, 브라더!’
고등학교를 마치고 나이지리아에서 유치원 교사와 신발 장사를 하던 오스틴 씨는 돈을 더 벌 수 있다는 말에 서른둘의 나이에 한국으로 왔다. 그게 벌써 20년 전. 경기도에 있는 한 염색 공장에 다니며 받은 첫 월급이 60만 원이었다. 그중 다달이 50만 원씩을 모아 나이지리아에 한국 시계를 팔기도 한 억척 생활인. 그 무렵, 한 봉사단체에서 한옥분 씨(55)를 만났다. 큰 키에 누구에게나 다정했던 그녀, 거두절미 튀어나온 진심은, “I love you!” 대뜸 고백을 해버렸다. 사실 옥분 씨도 호감은 있었지만, 고민도 많았다. 주변의 시선은 더 차가웠다. 흔들리는 옥분 씨의 마음을 붙잡아준 건 오스틴의 우직한 진심. 그렇게 4년의 세월을 딛고, 부부는 결혼했다. 올해로 17년째. ‘옥분아~’ 다정하게 이름을 불러주는 연하 남편 덕분에 촌스럽던 이름마저 사랑하게 됐다. 가진 것은 많지 않아도 함께라서 행복하다는 부부, 그런데도 그때를 생각하면 뜨거운 눈물이 난다. 후회 없는 선택, 부부에게는 사랑스러운 딸 새라(10)가 있다.
안타깝게도 첫아기를 유산하고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 결혼 7년 만에 새라(10)가 태어났다. 오스틴 씨는 아내의 산후조리부터 딸의 육아까지 온 힘을 다했다는데. 애지중지 키운 새라는 열 살이 되었다. 선물이라며 곱슬머리를 좋아하던 새라는 요즘 그 머리를 꽁꽁 묶어 감추는 열 살... 그것만 빼면 똑 부러지고 사랑스러운 금지옥엽. 아빠와는 영어로 대화하며, 오스틴의 한국어 선생님이 되었다는데. 책 읽기부터 받아쓰기까지 보통 엄한 선생님이 아니다. 건설 현장에서 일하면서도 하루하루가 행복하다는 가장(家長). 그 책임감은 어릴 적 돌아가신 아버지에게서 배운 것이었다. 아들 다섯에 딸 셋, 오스틴의 아버지는 비 오는 날에도 열 식구를 위해 부지런히 일하셨고, 밤이면 옛이야기를 들려주셨다. 그 모습을 닮아 오스틴 씨도 쉬는 날이면 아빠표 요리를 선보이고, 딸의 둘도 없는 친구가 돼준다. 현장 일은 경기도 타지만, 비가 오면 일을 쉰다.
일이 없는 날이 계속되면서, 오스틴이 귤밭 아르바이트를 나가는데... 오늘의 동료는 푸근한 제주 할머니들이다. 선물까지 받아 기분 좋게 퇴근한 오스틴 씨. 그런데 일당 봉투를 확인하더니 깜짝 놀라고 마는데...
결혼 후, 녹록지 않았던 삶. 남의 시선으로 상처받던 시간을 훌훌 털어버리고 아는 사람이 없는 곳, 제주로 온 가족. 처음에는 그저 갑갑하고 낯설었다는 오스틴. 마음 기댈 곳 하나 없고, 매서운 바람 소리까지 무서웠단다. 가족을 품어준 이들이 있었으니 바로, 영락리 어르신들이었다. 할머니들은 문 앞에 마늘이며 양파 등 농사지은 것을 두고 가셨고, 양친 부모님이 모두 안 계신 부부에겐 제주 부모님들이 되셨다. 그뿐인가, 건설 현장에서 만난 반장님들은 오스틴에게 일도 가르쳐주고, 고민 터놓는 형님도 소개해줬다. 제주살이 4년…. 가족은 튼실하게 뿌리를 내렸다. 오스틴 씨는 건설 현장 목수 팀의 중급 목수가 됐고, 옥분 씨도 3년 차 미용사가 됐다. 작은 미용실은 제주에서 만난 ‘언니’며 ‘엄마’가 매일 찾아드는 정겨운 곳이 됐다. 시골집을 얻어 살다가 작년에 작은 아파트를 샀을 때, 이웃들은 누구보다 기뻐해 줬다.
유쾌한 가장 오스틴 우다바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두 여자 옥분과 새라. 제2의 고향이 된 제주도에서 오스틴 씨 가족에게도 따뜻한 봄날이 다가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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