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우리 주변에서도 관청의 중재 혹은 도움이 필요한 경우, 공공기관 민원 절차를 통해 해결하고자 하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조선시대에도 이러한 일이 빈번하였으니, 문서의 형식을 갖추어 민원의 내용을 올리고 담당 직원이 처분을 내린 결과가 적혀 있는 문서를 소지(所志)라고 한다.
국립전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박영란(朴英蘭, 16세기)의 충절을 추천하는 문서’가 그 대표적인 예다. 이 문서에는 좀 더 재미있는 사연이 있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몇백 년이 지난 19세기 어느 날, 지역 유림들 21명이 예전 우리 지역에 충절로 뛰어난 인물이 있는데 합당한 대우를 받지 못했다면서 연대 서명하여 순찰사(巡察使)에게 그의 충절을 추천했던 연명첩(聯名帖)이기 때문이다.
박영란은 김제군에서 훈련원(訓鍊院) 주부(主簿)를 지낸 인물이었다. 문서의 내용에 따르면,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1556~1618) 공도 박영란이 하찮은 일이라도 애를 쓰고 절의에 죽으려 했던 뜻은 사람을 감탄하게 만든다.”고 할 정도였다. 또한 “임진왜란때 큰 공적이 있어 <호남절의록(湖南節義錄)> 에 실릴 정도였으며, 우리 고장(김제군) 선비들의 여론은 선무공신에서는 제외된 것에 대해 모두 서글프고 안타깝다 하며, 지금 임금이 효행과 충절로 뛰어난 사람을 추천받으니 연대 서명하여 진정한다”고 하였다. 마지막 부분에 21명의 이름과 함께, 충절이 뛰어나므로 진정한 대로 처분한다는 결과가 적혀 있다. 호남절의록(湖南節義錄)>
문서에는 계미년 6월이라고만 되어 있는데, 1799년에 간행된 <호남절의록> 이 인용된 것으로 보아 그 이후인 1853년일 것으로 추정된다. 본문에는 “선조대에 나라가 어수선해 졌습니다. 그때 재주 많은 준걸들이 조정에 가득 차고 절의를 지닌 선비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리하여) 나라의 기틀이 다시 높아지고 운세가 다시 새로워졌으니 충성스럽고 어진 인물들을 드러내 높여주며 인재들을 적재적소에 둔 효과가 어떠했습니까?”라고 하였다.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하고, 어진 인품을 잃지 않는 인재를 적재적소에 두는 것이 중요함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호남절의록>
민길홍 국립전주박물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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