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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 유물로 읽는 옛 이야기] 쥐를 화폭에 담다

2020년 새해는 경자(庚子)년 쥐띠해이다. 경자(庚子)는 십간십이지(十干十二支)로 연도를 표기한 것이다. 경(庚)은 십간(十干)의 일곱 번째로서, 방위로 서쪽, 오방색으로는 흰색에 해당된다. 자(子)는 십이지의 첫 자리로서, 방위로 정북(正北)을, 달로 음력 11월을, 시간으로는 오후 11시부터 오전 1시까지를 말한다. 띠는 사람이 태어난 해의 십이지를 상징하는 동물이다. 쥐띠는 갑자[甲子, 靑], 병자[丙子, 赤], 무자[戊子, 黃], 경자[庚子, 白], 임자[壬子, 黑]의 순으로 60갑자를 순행한다. 요즘같이 굳이 색깔로 이야기한다면 경(庚)이 오방색으로 흰색에 해당되니, 경자년는 흰 쥐띠해이다. 조선시대의 그림 중에서 쥐의 생태를 사실적으로 묘사한 그림이 제법 있다. 쥐그림은 들에서 수박이나 홍당무를 갉아먹고 있는 모습 등 재미있는 주제의 포착과 서정 넘치는 표현, 아름다움 색채감각이 돋보이도록 그려졌다. 특히 최북(崔北, 1720년경)은 무주 최씨로 무주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는 우리 지역 화가인데, 무를 갉아먹는 쥐를 그렸다. 쥐의 생태와 습성을 사실적으로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다. 신사임당(申師任堂)의 수박과 쥐그림은 수박의 빨간 속살과 그 앞에서 씨앗을 먹고 있는 쥐 한 쌍, 나비 등이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다. 겸재 정선(謙霽 鄭敾)이 그린 서투서과(鼠偸西瓜)에서 쥐가 수박을 갉아먹고 있고, 심사정(沈師正)이 그린 초충도첩(草蟲圖帖)에는 쥐가 무을 먹고 있다. 심사정의 그림도 최북의 그림과 유사하다, 수박은 씨가 많다. 씨가 많다는 것은 다산과 풍요를 의미한다. 여기에 더해 다산 왕인 한 쌍의 쥐는 부부 사랑과 다산, 풍요이다. 무와 당근은 《시경 詩經》제1편 국풍 곡풍(國風 谷風)에 보면 부부의 백년해로를 상징한다. 무는 아래 위를 다 먹을 수 있다. 무는 뿌리만을 보고 잎새까지 맛이 없다고 내버리지는 않는다는 뜻으로 부인이 나이 들어 얼굴이 시든 것만 생각하고, 옛날에 고생했던 일이나 그의 미덕까지 버리고 딴 여자에게 다시 장가가면 안 된다는 뜻이다. 쥐가 수박무와 함께 그려진 그림은 부부애와 다산의 상징으로 읽어야 한다. 쥐는 문화적으로 재물(財物)다산(多産)풍요기원(豊饒祈願)의 상징이며, 미래의 일을 예시(豫示)하는 영물이다. 사람에게 쥐는 결코 유익한 동물이 아니다. 생김새가 얄밉고, 성질이 급하고 행동이 경망한데다 좀스럽다. 진 데 마른 데 가리지 않고 나돌며 병을 옮기고, 집념이 박하고 참을성이 없고 시행착오가 많다. 더욱 혐오스러운 것은 양식을 약탈하고 물건을 쏠아 재산을 축낸다. 백해무익(百害無益)한 동물이다. 한 가지 쓸모가 있다면 의약(醫藥)의 실험동물로서의 공헌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람의 입장에서 본 것일 뿐, 자연계의 일원으로서의 쥐는 나름대로 그 존재 의의가 자못 크다. <끝> /천진기 국립전주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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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12.30 17:31

[박물관 유물로 읽는 옛 이야기] 진안 도통리 중평마을 초기 청자가마

전라북도의 내륙 중에서도 가장 내륙이라 할 수 있는 진안 도통리 초기 청자가마터가 20132017년에 걸쳐 총 5차례 조사 되었다. 진안 도통리 청자가마터에서는 이른 시기의 선해무리굽 및 중국식해무리굽 청자완들과 함께 한국식해무리굽 청자완이 수습되었으며, 진흙가마와 벽돌가마가 각 1기씩이 완벽한 상태로 확인되었다. 2017년에 완벽하게 전모를 들어낸 벽돌가마는 2016년 확인된 고창 용계리 초기 청자가마 보다도 길이가 5m 정도가 더긴 43m로 확인되어 호남지역에서는 최대 규모로 가마로 확인되었다. 20162017년에 걸쳐 확인된 벽돌가마는 초기의 벽돌가마에서 점진적으로 진흙가마로 변화되는 과정을 한 곳에서 보여주는 최초의 가마로, 한국 초기청자의 변화 과정을 일목요연하게 보여준다고 하겠다. 2호 가마의 운영시기는 10세기 초 중반에 처음 축조되었다가 퇴화형해무리굽이 생산되는 11세기 초반에 폐요 된 것으로 추정된다. 2015년 시굴 및 발굴조사에서 확인된 제1호 가마인 진흙가마는 확인된 길이가 13.4m로 이 가마에서는 한국식 및 퇴화형해무리굽의 청자들이 수습되어 가마의 운영시기는 대체적으로 11세기 중엽으로 판단된다. 진안 도통리 청자가마의 조업시기는 현재까지의 5차례 조사결과로 추정하여 보면 초기의 벽돌가마와 그 이후의 진흙가마 모두가 확인되고 있어, 그 운영시기는 현재 10세기 초중반인 930 50년경에서 약 11세기 중반경까지 운영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전주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는 동고산성에서는 중국식해무리굽 청자가 수습되었는데, 발굴된 해무리굽 청자들은 그 일부가 진안 도통리에서 수습된 해무리굽 청자완들과 친연성을 가지고 있다. 무문이며, 유색이 매끄럽지 못한 점, 초기 청자의 대표적인 유색인 올리브색 유약이 사용된 점 등이 유사하여 일부에서는 진안 도통리에서 제작된 청자의 수요처로서 전주 동고산성을 거론하기도 한다. 동고산성 외에 익산 미륵사지, 남원 실상사, 정읍 고사부리성 등에서도 초기 청자완이 출토되었는데, 이들 중 백제시대에 축성이 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정읍 고사부리성 출토 청자완들은 진안 도통리 출토품과 유사성이 인정된다. 진안 도통리 청자 가마터는 청자의 제작과 공급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고창 용계리나 부안 유천리 가마보다는 불리한 요소가 많이 존재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륙의 오지에 가마터를 조성한 것은 고창과 부안지역의 정치적 불안정성으로 인해 후백제 견훤시대에 지역적 안정성을 고려하여 진안 도통리에 가마를 조성한 것이라 추정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도통리 청자들은 완주와 진안의 경계선에 있는 마티고개를 넘어 전주로 공급되거나 전주의 내륙수로망을 이용하여 다른 지역으로 공급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하겠다. 또한 전주를 떠나 만경강과 금강 수계를 따라 공급되었을 진안 도통리 청자들은 지금의 군산시 임피면에서 충청과 호남의 다른 지방으로 운송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정상기 국립전주박물관 학예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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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12.23 17:22

[박물관 유물로 읽는 옛 이야기] 고창 용산리 명문분청사기와 사기장

나는 사기장이다. 그릇을 빚는 사발대정이다. 수중군(조수)이 사토를 채취하여 그릇을 빚도록 곱게 이겨놓은 꼬박(질흙뭉치)을 물레로 돌려 차서 접시, 사발, 병 등을 만든다. 그릇을 흙판 위에 올려 그늘에서 잘 말리고 나면 굽대정(마조장)이 굽을 깎는다. 굽대정은 신통하게도 굽 안팎의 얇고 두꺼운 것을 잘도 알고서 알맞게 굽을 깎는다. 그런 다음 꾸덕꾸덕하게 적절히 마른 그릇 바깥 면에 무늬를 장식한다. 도장으로 무늬를 찍고 흰 흙을 메꿔 넣어 꽃무늬를 만들거나, 그릇 전체를 흰 흙으로 바른 후, 그 위에 춤추는 듯한 물고기 등을 그리기도 한다. 그리고 접시 안 바닥이나 그릇에 예빈시禮賓寺의 예빈, 내섬시內贍寺의 내섬 등을 찍거나 새겨 넣는데, 이것은 관청이름이다. 글자에 백토로 메꿔 넣은 것이 마치 무늬 같아 보일게다. 예빈시는 외국사절의 잔치와 왕실의 종친과 재상님들의 음식을 마련하는 관청이라고 한다. 내섬시는 궁궐 2품 이상 관리에게 술을 주고, 왜인과 야인에게 음식물을 공급하는 곳이다. 이렇게 잘 보이도록 관청의 이름을 새겨 넣은 그릇은 궁궐로 올라가는 사기그릇이다. 나는 이래 봬도 이 마을에서 궁궐에서 쓰는 사기그릇을 만드는 사기장으로 꽤나 솜씨 좋다는 말을 듣는다. 예전 태종 임금님 때 그릇에 관청 이름을 새겨 넣으라고 명하셨다고 한다(1417년). 이렇게 명하신 까닭은 그릇을 사용하는 관청을 표시하여 그릇이 도난당하는 것을 막고 관리를 잘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이런 조치 후로 없어진 그릇 수를 더 구워 올리는 일이 줄어서 좀 살기 좋아졌다고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말씀하신 적이 있지만, 지금도... 항시 봄, 가을마다 궁궐로 구워 올려 보내는 사기그릇 말고도 필요할 때마다 구워서 올려 보내는 그릇의 숫자는 계속 늘어나기만 한다. 그래도 사기그릇을 만드는 일은 고되지만 신명 난다. 이제 초벌구이 한 그릇에 유약을 씌운 후 도짐을 받쳐가며 가마에 재임한다. 드디어 불의 심판을 받을 때가 되었다. 몸을 닦고 마음을 모아 기원을 올린 후 가마에 불을 지핀다. 뜨거운 불기운이 넘실넘실 가마를 타고 올라간다. 마치 붉은 용이 하늘로 오르는 것 같다. 좀 더 가마에 장작을 때야겠다. 제발 잘 익혀져 잘생긴 사기그릇이 나오길 거듭 거듭 바라고 또 바래본다. *조선시대 15세기 후반 고창 용산리 사기장이 궁궐에 공납하는 명문분청사기를 제작하는 과정을 가상해 구성해 본 글. /김현정 국립전주박물관 학예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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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12.16 17:05

[박물관 유물로 읽는 옛 이야기] 도자기로 본 익산 미륵사지

미륵사지는 백제 무왕(재위 600~641년)에 건립되어 조선시대인 16세기까지 사찰이 운영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미륵사지에서는 7세기 초반 중국 당에서 수입된 청자부터 조선시대 분청사기와 백자까지 확인되어 미륵사지 출토 도자기를 보면 미륵사지의 운영시기를 개략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미륵사지 출토 도자기는 크게 5개의 단계로 구별할 수 있다. 그 첫째가 백제 무왕대인 7세기에서 10세기 대代로 이때는 중국 당唐의 중국식해무리굽으로 제작된 중국에서 수입된 청자완이 주로 출토되는 단계이고, 두 번째가 진안군 성수면 도통리 제2호가마인 벽돌가마에서 제작된 선해무리굽 단계의 청자완이 미륵사지에서 확인되는 시기이다. 세 번째가 통일신라와 고려시대에 중국 당과 오대五代에서 제작된 백자와 청자가 한반도에 수입되어 미륵사지에서 확인되는 단계이다. 네 번째는 고려시대에 제작된 청자들이 출토되는 단계이며, 마지막 단계가 조선의 건국에서 16세기 미륵사지가 폐사되는 단계에서 출토되는 분청사기와 백자가 출토되는 단계이다. 먼저 미륵사지에서는 굽의 폭이 좁고, 높이가 약간 높은 형태를 가진 중국계 해무리굽 완 수십여점이 발굴되었다. 유색은 녹청색, 녹황색, 올리브색을 띠며, 굽의 접지면이 넓은 것이 특징이다. 유색은 단정하여 전북 진안 도통리 출토 해무리굽 완과는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 단계에서 출토된 미륵사지 출토 해무리굽 청자완은 당대唐代 월요越窯에서 제작된 양질의 청자해무리굽완으로 판단된다. 진안군 도통리 중평마을 가마에서 출토된 선해무리굽과 중국식해무리굽 청자들은 중국에서 수입한 해무리굽 완보다는 유색의 상태나 굽의 구조등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는데, 도통리 출토품과 유사한 청자완들이 미륵사지에서 수십점이 확인되고 있다. 통일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에 걸쳐 중국에서 미륵사지로 수입된 도자기에서 다양한 중국계 도자가 확인된다. 통일신라시대 수입된 도자기로는 해무리굽을 가진 청자와 백자가 있는데, 이중 해무리굽 백자와 청자는 당唐 자기의 특징이다. 태토胎土의 입자가 곱고 밀도가 치밀한데, 특히 청자 사발은 옅은 담황색을 띠는 유약이 입혀져 있고 안쪽 바닥이 밋밋한 곡면曲面을 이루는 등 전형적인 당 월주청자越州靑磁 형태이다. 고려 초기 미륵사에 유입된 자기는 당시 중국에서 널리 사용되던 질 좋은 백자로 보인다. 정요에서 생산된 백자 사발, 백자 접시와 경덕진景德鎭에서 생산된 백자 꽃 모양 접시, 청백자 접시도 확인되는데, 이러한 도자기류는 9~12세기 무렵 중국에서 생산된 것으로 판단된다. 고려시대에 제작된 미륵사지 출토 청자는 순청자와 상감청자象嵌靑磁로 구별되며, 퇴화청자堆花靑磁와 철화청자 鐵畵靑磁도 소량 확인된다. 상감청자는 전체 청자 출토량의 10%에도 못 미쳐 적은양이지만 청자의 발생단계에서 말기에 해당하는 다양한 청자들이 출토되었다. 13세기말~14세기 생산품이 대다수를 차지한다. 마륵사지에서는 15~16세기 제작된 분청사기와 백자가 소량 확인되는데, 분청사기는 상감과 인화무늬가 새겨진 접시와 대접들이며, 백자는 순백자로 마상배 접시 대접 잔 등의 생활용품 위주이다. 이러한 분청사기와 백자는 양도 소량이며 질적으로도 우수하지 않은 것으로서 이것은 미륵사지가 15~16세기가 되면 지방의 소규모 사찰로서 명맥을 유지하다가 16세기무렵에 폐사가 진행되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는 증거라 하겠다. 미륵사지 출토 도자기는 미륵사지 건립에서 폐사기간까지의 도자사를 체계적으로 보여주는 중요한 유적으로 한국 도자사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다 하겠다. /정상기 국립전주박물관 학예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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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12.09 18:10

[박물관 유물로 읽는 옛 이야기] 조선왕조실록 보관 상자

국립전주박물관 역사실에는 644042cm 크기의 검은색 나무 상자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투박하게 보이는 검은색 상자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정성껏 단단하게 만든 상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상자가 바닥에 바로 닿지 않도록 상자의 발인 족대足臺를 달아두었고, 상자를 구성하는 나무판들이 사이가 벌어지거나 떨어지지 않도록 각 면마다 모서리가 둥근 직사각형의 감잡이를 3개씩 부착해 두었습니다. 한아름이 넘는 상자의 크기만큼이나 큰 물건을 보관하기 위한 상자였던지, 뚜껑과 몸체를 일반 경첩이 아닌 고리 모양의 경첩을 달려있으며, 뚜껑을 열었을 때 뚜껑을 안정적으로 받치기 위한 받침대가 있던 흔적이 남아있습니다. 상자의 양쪽 측면에는 활모양의 들쇠가 달려 있어, 상자를 종종 들어 올려 이동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상자 앞부분에는 宣祖實□, 第□櫃라고 적힌 종이가 부착되어 있습니다. 종이 메모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이 상자는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한 상자입니다. 상자 크기에서도 알 수 있듯이 조선왕조실록은 책 크기가 약 5233cm 정도로 일반 서적보다 크기가 컸으며, 영원히 보존하기 위해 최고급 종이를 사용했습니다. 최고급 종이로 만든 나라의 보물인 실록은 어떻게 상자 안에 담겨 있었을까요? 그 과정은 실록을 편찬하고 봉안하는 전 과정을 기록한 <실록청의궤>에 잘 남아 있습니다. 그 과정을 간략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실록 상자는 천궁과 창포 가루 주머니를 상자의 바닥에 넣고 저주지楮注紙(닥나무로 만든 종이)로 덮는다. 실록은 홍정주紅鼎紬 4폭 보자기에 부록부터 권 번호 역순으로 넣어서 싼 후 저주지와 천궁, 창포 주머니를 넣고 상자를 닫는다. 상자에 담은 후 총재관總裁官이 자물쇠를 잠그고 이 자물쇠를 저주지로 봉하고 봉안한 날짜를 적는다. 자물쇠 열쇠도 저주지로 두르고 총재관이 착함하여 자물쇠 중간에 매단다. <승정원일기>의 습기를 막는 데는 창포가루 만한 것이 없으니 실록이 지금까지 무탈한 것은 전적으로 창포가루 때문이다.라는 기록처럼, 천궁과 창포는 방충, 방습 효과를 위한 것이고, 자물쇠와 열쇠를 종이로 봉안하는 것은 실록의 보안을 유지하기 위한 것입니다. 조선왕조실록은 역사를 공명정대하고 정확하게 기록하기 위해 왕조차도 보지 못하게 했을 정도로 보안에 철저했습니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조선왕조실록은 태조부터 철종까지 472년간의 역사를 기록한, 인류 역사상 단일왕조 역사서로서 가장 규모가 큰 책입니다. 국립전주박물관 상설전시실 역사실에서 조선왕조실록을 품고 있었던 투박하게 보이지만 단단한 상자를 감상하며, 역사를 기록하여 후손에게 전하려 한 우리 선조들의 마음을 떠올려 보기 바랍니다. /이기현 국립전주박물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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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12.02 17:32

[박물관 유물로 읽는 옛 이야기] 정읍 무성리 ‘머리 없는 미륵님’

그 옛날 그 지역에서 최고의 솜씨를 자랑하는 석공은 사람들의 염원을 모아서 돌을 찾고, 미륵을 다듬어서 세웠습니다. 아마 그 가운데 석공이 가장 정성을 쏟은 곳은 아마 얼굴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조각된 그 모습은 우리 자신들의 얼굴입니다.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입니다. 이 땅에 살았고, 살고 있고, 살아갈 우리들의 얼굴입니다. 바로 과거현재미래의 한국인 모습입니다. 미륵은 이 땅에서 대를 잇기 위한 어머니들에게 코를 내어주어 얼굴의 형체도 없어졌습니다. 세월 속에서 미륵은 한적한 원래의 그 자리에 그대로 계시기도 하지만 넘어지고, 다른 곳으로 옮겨지기도 했습니다. 미륵은 본래 공동체의 모든 것입니다. 그런 미륵이 개인 집으로, 사찰로 여기저기 옮겨 다니면서 목도 부러지고, 손도 부러져 다른 돌로 의족(?)하고 계십니다. 그래도 사람들은 향을 피우고, 초를 밝히고 정화수를 떠놓고 세상사의 모든 고초와 바람을 미륵에게 이야기합니다. 여전히 미륵은 민초들의 바람을 듣고 계십니다. 미륵은 그 모든 바람을 들어주십니다. 그 바람과 사연들을 모으면 개인사가 되고, 마을의 역사, 고을의 역사, 나라의 역사로 엄청난 민중생활사가 될 것입니다. 박물관 입구나 야외전시장에서는 목이 없는 부처님이나 목만 있는 부처님을 많이 만납니다. 그 설명문은 어렵습니다. 그때마다 정호승 시인의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라(창비, 1999)라는 시집 속 소년부처라는 시를 전시 설명문으로 쓰고 싶었습니다. 여름방학을 맞은 초등학생들 조르르 관광버스에서 내려 머리 없는 돌부처들한테 다가가 자기 머리를 얹어본다 소년부처다 누구나 일생에 한 번씩은 부처가 되어보라고 부처님들 일찍이 자기 목을 잘랐구나라는 내용입니다. 부처님은 두상을 얻고, 얹은 이는 부처가 되니 서로에게 날개를 달아주는 것입니다. 지나가는 모든 관람객들은 눈으로뿐만 아니라 마음으로도 보고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국립전주박물관에도 고려시대 정읍 무성리에서 출토된 목 없는 키 큰 미륵님이 서 계십니다. 목 없는 부처께 머리를 만들어 주고, 누구나 부처가 되어 보게 하여 주고 싶었습니다. 부처님과 사진 찍으면 누구나 부처님 될 수 있는 장소로 만들었습니다. 물론 필자가 읽기도 어려운 설명문은 있지만. /천진기 국립전주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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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11.25 17:01

[박물관 유물로 읽는 옛 이야기] 그림 속 매화의 묵향

매화 그림을 자주 그렸던 석정石亭 이정직李定稷(1841~1910)은 실제 매화보다 매화 그림이 더 좋다고 한 바 있다. 人道眞梅好 사람들은 진짜 매화가 좋다 하지만 吾憐畫更好 나는 매화 그림 더욱 좋아하네 高標看其潔 세속 높이 초월함 이미 조촐하며 未有減容時 용모 감쇠하는 때도 없어라 매화 그림은 실물 매화의 형사形寫를 넘어서서 전신傳神의 경지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먹을 찍어 그은 붓끝에서 묵향이 더해져, 그림은 매화의 고결한 자태를 포착하는 동시에, 이미 형태를 넘어선 정신적인 가치를 전한다. 또한, 호남삼걸湖南三傑로 일컬어지는 해학海鶴 이기李沂(1848-1909)와 석정 이정직이 나눈 글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그대 그림을 본 적 있으시오? 가장 뛰어난 것은 뜻을 그려 신을 전한 것이요[寫意而傳神], 그 다음은 형상을 똑같이 그리는 것[사형寫形]입니다. 꽃과 새를 예로 들자면, 꽃받침, 꽃봉오리, 꽃, 꽃술, 새의 부리, 눈, 깃털, 발톱 등을 꼭 닮도록 그리는 것입니다. 익숙해지고 또 익숙해지고 능숙하고 또 묘해진 이후에야 형사를 벗어나 그 뜻을 그리고 정신을 전할 수 있습니다. 정교한 표현으로 대상을 사실적으로 그리는 것을 넘어서서, 그동안 공부해 온 학습량과 내공을 통해 필력이 충분히 무르익은 후에야 비로소 그 안에 담긴 정신을 전달할 수 있다고 보았다. 얼마나 무르익어야 그 경지에 오를 수 있을까. 그리고 얼마나 노력을 했을까. 이정직이 그린 매화 그림은 똑같은 매화가 하나도 없다. 화면 구성을 자유자재로 하였고, 그렇게 매화의 다채로운 면모를 통해, 매화의 본질과 의미를 찾고자 누구보다 노력했음을 알게 해 준다. 홍매紅梅와 백매白梅를 아래위로 배치하고 빈 공간에 시를 곁들인 이종석 소장 <묵매도>에서는 화면 구성의 묘를 볼 수 있으며, 국립전주박물관 <서화첩>에 실린 14점의 매화도에서는 다채로운 매화의 모습을 담아내고자 끊임없이 연구하고 매진했던 이정직의 노력을 읽어낼 수 있다. /민길홍 국립전주박물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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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11.18 18:54

[박물관 유물로 읽는 옛 이야기] 석정 이정직의 서예 연구자세 '담계재현첩'

석정石亭 이정직李定稷(1841~1910)은 칸트와 베이컨 철학을 우리나라에 최초로 소개했고, 이를 성리학과 비교 분석한 남다른 연구자였다. 조선말기의 유학자 이정직의 학문적 탐구는 성리학 뿐 아니라 서양학문과 철학, 그리고 천문, 지리, 의학의 범위를 넘어 넓고 깊게 펼쳐졌다. 독설가로 유명한 매천梅泉 황현黃玹은 학문적 동반자이자 마음의 친구로 이정직을 존경했고 모르는 것이 없고 통달하지 않은 바 없는 희귀한 인재로 찬사했다. 이정직은 따뜻한 인품을 지녔고, 세속의 영달에 매달리지 않았던 고고한 선비였다. 당대 최고의 지성이던 그는 놀랍게도 홀로 학문적 경지를 이룬 독보적인 인물이었다. 가르칠 스승이 주변에 없을 정도로 학문의 경지에 올랐음에도 그의 가난한 환경으로 더 높은 사승관계 맺을 수 없었다. 이정직의 스승은 바로 고인古人이었다. 끊임없이 고인의 학문을 연마하며 그는 이를 자신의 것로 쌓아갔다. 이정직은 서예가로도 유명했다. 그는 임서臨書를 매우 중시했다. 고인의 서법의 특징과 서풍을 파악하는 서예 연마와 연구 방식인 임서를 행함에 있어, 그는 말미에 반드시 고인의 필적을 평가하고 연원과 가치 등을 세세하게 기록함으로써, 서법을 파악하였다. 이정직이 옹방강翁方綱(1733-1818)의 글씨를 임서한 <담계재현첩覃溪再現帖>은 그의 서예 연구 자세를 잘 보여준다. 청의 서예가이자 금석학자인 옹방강은 첩학帖學과 비학碑學 두 영역을 모두 아울렀던 대가로, 고법古法의 법도를 글씨에서 실천하고자 평생을 노력하였다. 김정희金正喜와 신위申緯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이정직은 옹방강 서예에 대한 관심을 임서로써 남겼다. <담계재현첩>에서 주목할 것은 이정직의 발문이다. 여기에 그의 서예 연구 자세가 담겼다. 자하 신위의 글씨는 석암石菴 유용劉墉과 담계覃溪 옹방강으로부터 왔는데, 석암은 전적으로 종요鍾繇를 배웠고, 담계는 구양순에게서 득력得力하고, 미불과 동기창을 드나들었다. 그러나 두 분의 묵법墨法은 모두 동파東坡 소식蘇軾을 귀숙처歸宿處로 삼았다. 고인古人의 글씨를 임서할 땐 마땅히 먼저 그 글씨의 유래를 알아야 바야흐로 따라갈 수 있게 된다. /박성원 국립전주박물관 학예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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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11.11 17:03

[박물관 유물로 읽는 옛 이야기] ‘석정집’, 전북 지역민이 마음 모아 간행하다

타고난 바탕이 뛰어나니, 재예인들 어찌 부족하랴. 보면 곧 깨달아 막히지 않고 원활하여라. 세간 명리에 벗어나고 얽매임 싫어하는 성품이셨다. 처세는 그 나름의 방법이 있어 세속에 뒤섞이지 않고 여유로우셨네. 어린아이, 아낙네도 좋아하였고 평이한 마음, 모나지 않았다. - <裕齋集> 이정직(李定稷, 1841~1910)의 제자 송기면(宋基冕, 1882~1956)이 스승 이정직이 돌아가신 후 남긴 시이다. 제자 송기면이 회고한 스승의 모습처럼 이정직은 명리名利를 따지지 않고 주변 사람들을 아우르고 보살피는 마을의 지도자였다.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활동한 여러 예술가들은 자신의 그림을 팔아서 생계를 유지하곤 했다. 하지만 이정직은 고법古法(옛 사람의 높은 법)을 배우고 옛 스승의 경지에 이르고자 노력할 뿐, 그림과 글씨로 이름을 드러내고자 하지 않았다. 1894년 5월부터 세상을 떠난 1910년 11월까지 이정직은 김제에서 저술 활동에 전념했고, 산문 273편과 시 927제題 1279수를 남겼다. 이정직은 생전에 자신의 글을 <연석산방미정문고燕石山房未定文藁>, <연석산방미정시고燕石山房未定詩藁>등으로 정리했다. 산문은 세상의 이치를 논증하고 사물의 이치를 밝히는 내용을 담은 논변체論辯體 산문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이정직은 진실한 마음을 담백하고 쉬운 시어로 표현한 시를 좋은 시로 생각하고 그런 창작을 했다. 이정직의 소탈한 성품과 1910년 우리나라가 처했던 상황 때문에,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경제적인 이유로 문집을 간행할 수 없었다. 마을의 지도자였던 이정직의 저술이 사라지는 것을 막기 위해 지역 사람들이 힘을 모았고, 10여 년이 지난 1923년 드디어 <석정집石亭集>이 간행됐다. <석정집>에는 김영한金寗漢(1787~1950), 이건방李建芳(1861~1939)이 쓴 서문序文과 최보열崔輔烈(1847~1922)의 발문跋文이 있으며, 이정직의 오랜 벗 황현黃玹(1855~1910)이 1901년 이정직의 회갑을 맞이해 지은 경수석정선생육십일세서慶壽石亭先生六十一歲序를 서문으로 대신 싣고 있다. 이정직이 자신의 문집에 황현의 글을 받고 싶다는 스승의 평소의 희망을 제자들이 실현한 것이다. 송기면을 비롯한 <석정집>을 편집한 제자들이 이정직의 도학적道學的 측면을 부각시키려다 보니 이기설理氣說, 태극설太極說과 같은 성리학적 내용이 상대적으로 많이 포함되어 있다. <석정집>은 문집 간행 이후에도 꾸준히 교정해 오자誤字를 찾아 문집에 정오표를 함께 수록하는 등 편집자들의 정성이 가득 담긴 문집이다. 마을 사람들을 포근하게 감싸주던 생전의 이정직의 모습을 보여주듯 <석정집>은 제자와 지역사람들의 힘을 모아 간행됐고, 마지막 부분에는 간행에 참여한 80여 명의 제자와 지역 유지의 이름을 담고 있는 뜻깊은 책이다. /이기현 국립전주박물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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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11.04 17:37

[박물관 유물로 읽는 옛 이야기] 전주성(全州城) 기와

우리 전주 시민들은 전주(全州)라는 도시의 기원에 대해 한번쯤 생각해 보았음직하다. 일반적으로 어떤 지명의 뿌리를 찾고자 한다면 우선 찾는 게 기록이다. 전주의 출발은 완전하다 온전하다와 뜻이 통하는 완산(完山)에서 비롯되는데 아마도 고구려 보장왕 9년(650) 승려 보덕이 완산(完山) 고대산(孤大山)으로 옮겼다라는 기록으로 보아 삼국시대에도 완산이지 않았을까. 이후 신라는 일련의 통일전쟁 상황이 정리가 되고 신문왕 5년(685) 지금의 전주에 완산주(完山州)를 설치하여 9주 5소경 체제를 완비하였다. 경덕왕 16년(757)에는 중국화 정책의 일환으로 전국의 주군현 명칭을 한자로 바꾸는 조치로 완산주를 전주(全州)로 개명하였다. 전주성(全州城)은 어떠할까. 전주에 있는 성이라는 의미일 게다. 기록으로는 고려 명종 12년(1182) 전주사록 진대유(陳大有) 관련 기사에 등장하는 폐성고수(閉城固守)와 고종 40년(1153) 8월 몽고병 관련 기사에 등장하는 전주성(全州城)과 반석역(半石驛)은 내용상 전라감영의 고지인 고려시대의 전주성에 가깝다. 그런데 전주성의 또 다른 실체가 있다. 사진에 보이는 동고산성에서 발굴된 전주성(全州城)명 막새들이다. 가운데에 全州城의 명문과 양쪽에는 무사무늬가 있는 암막새 1점, 양쪽에 새 무늬가 있는 암막새 2점, 명문과 연꽃무늬가 있는 수막새 7점이다. 모두 동고산성 주건물지 출토품이다. 이 기와들은 견훤(甄萱) 백제의 전주성을 보여주는 실물이다. 예로부터 막새는 궁궐이나 사찰, 관청의 지붕에 올리는 건축 부재로 건물의 권위를 상징하였다. 이 건물은 정면 22칸, 측면 4칸으로 정면과 양 측면에는 회랑도를 두었다. 건물터는 길이 84.2m, 너비 14.1m로 평면 형태와 초석의 배치상태로 본다면 2층 이상의 외관을 가진 건물로 추정되며 단일 건물로는 국내에서 가장 크다. 당시 조사자는 왕궁의 정전과 같은 건물로 보았는데 동고산성이 견훤궁터로 전해진다는 1688년 「성황사중창기」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다만 도심과 다소 떨어진 현실적인 점을 고려할 때 평지 전주도성의 배후산성으로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한편 전주의 지명이 8세기 중반부터 사용되어 동고산성의 전주성 기와가 보다 이른 시기일 가능성도 있으나 동고산성에서 조사된 11개의 건물지와 성문지의 개축이 대부분 9세기말 ~ 10세기 초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아 이 또한 견훤의 전주성 쪽으로 더 기운다. 결론적으로 전주성(全州城)은 2곳이지 않았을까. /최흥선 국립익산박물관 학예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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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10.28 17:06

[박물관 유물로 읽는 옛 이야기] 대나무 그림 속에서 선비 정신을 읽다

6폭에 걸쳐 대나무를 그리고, 마지막 폭 끝에 1909년 정월 초사흘에 호서실好書室에서 그렸다고 적었다. 1909년은 69세 이정직이 세상을 떠나기 1년 전이고, 호서실은 책을 좋아하는 방이라는 뜻의 서재 이름이다. 6폭의 병풍은 3개의 종이를 이어 160.032.0cm의 화면을 만들고 그 안에 대나무를 담았다. 병풍 상태로 보면 2미터를 넘는 대작大作이다. 화폭 속 대나무는 비가 온 뒤 대나무, 우죽雨竹에서부터 새로 돋아나는 신죽新竹에 이르기까지 모양도 자세도 다양하다. 댓잎은 위로 뻗기도 하고, 아래로 쳐지기도 하며, 하나하나에 날카로운 필력의 내공이 담겨져 있다. 또한 농묵으로 그린 댓잎과 담묵의 댓잎이 어우러져 자연스러운 공간감을 살려주고 있다. 자연 속 실제 대나무는 보통 숲을 이루는데 그림 속 대나무는 한두 그루씩 쓸쓸하게 그려진다. 댓잎도 소략하다. 숲을 이룰 때보다 한두 그루씩 홀로 서 있는 모습은, 묵향墨香을 머금고 멋스러운 느낌을 준다. 여백에는 중국 당시唐詩 가운데 대나무를 노래한 시를 골라 적었는데, 그림의 전체 윤곽을 따라가며 글의 시작 위치를 조절함으로써 전체적인 조화를 이끌어냈다. 이정직은 「종죽기種竹記」에서 국화, 파초와 함께 대나무를 직접 재배한 경험을 이야기하며 그 효용성을 논한 바 있다. 6폭 병풍에서 대나무 그림 옆에 곁들인 중국 시를 보면, 어울리는 시를 잘 찾아 매칭 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 그가 직접 대나무를 노래한 시 또한 문집에 많이 전하고 있어, 이정직이 그만큼 시문학에 조예가 깊었음도 알 수 있다. 이정직에게 글을 받으러 찾아오는 이들도 많았고, 제자가 되고자 찾아오는 이들도 많았지만, 그는 세상에 이름이 나는 것에 연연해하지 않았다. 시대를 관통하는 힘을 고법古法에서 발견하고 철저한 학습과 끊임없는 탐구로 자신만의 세계를 열어갔다. 6폭의 대나무 그림에서는 그러한 꼿꼿하고 철저한 선비 정신을 읽어낼 수 있다. /민길홍 국립전주박물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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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10.21 17:51

[박물관 유물로 읽는 옛 이야기] 청자 국화무늬 잔과 잔받침

이규보李奎報(1168~1241)는 고려 시대의 대문인이었다. 그의 본관은 황려, 호는 백운거사이며, 시‧거문고‧술을 좋아하여 삼혹호三酷好선생으로 불렸다. 그는 글과 시에 대한 재주가 탁월하였고, 늘 술과 시를 오락 삼아 침상에 누어서도 시를 끊임없이 읊었다고 한다. 문집으로는 『동국이상국집』이 남아 있다. 그가 쓴 시 가운데 청자술잔에 관한 시가 있다. 청자술잔을 예찬하며 그로 인해 술에 탐취貪醉하는 내용이다. 그의 호를 떠올려보면 이런 소재로 시를 썼다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 모른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가 청자 제작 과정과 청자의 특성을 아주 정확히 파악하여 표현하고 있다는 점이다. 시를 짓게 된 계기는 김군金君이 녹색 자기[綠甆] 술잔을 두고 시를 지어 달라는 요청이 있었기 때문이다. 청자술잔을 함께 완상할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시상詩想은 청자의 제작으로 시작하여, 청자의 특성, 솜씨와 문양 예찬으로 이어졌다가 술잔으로 인한 술의 탐취로 끝을 맺는다. 앞의 세 부분을 자세히 살펴보자. 남산에서 많은 나무를 베어[落木童南山] 연기가 해를 가릴 정도로 가마에 불을 지펴서[放火烟蔽日] 청자를 구워내었다[陶出綠瓷杯]. 많은 땔나무가 필요한 것은 청자는 이전 도기와 달리 1100-1200도의 높은 온도에서 구워 내기 때문이다. 또한 열에서 우수한 하나를 골랐다[揀選十取一]고 할 정도로 질 좋은 청자를 얻기가 쉽지 않았다. 그렇게 얻은 청자술잔은 선명하게 벽옥빛이 나고[瑩然碧玉光], 영롱하기가 수정과 같으며[玲瓏肖水精], 단단하기가 돌과 맞먹는다[堅硬敵山骨]고 하였다. 이 시구들보다 청자의 특성을 더 정확히 간파하여 말하기는 어렵다. 청자색은 옥에서 유래하였다. 이 선명한 벽옥색을 고려인들은 보통 비색翡色이라 불렀다. 수정과 같은 영롱함은 유약이 유리질화 된 자기표면을 가리키고, 돌 같은 단단함은 강한 경도를 말한다. 이 같은 유약 상태와 경도는 높은 기술력으로 제작되는 자기의 특성이다. 또한 술잔을 만든 솜씨는 하늘의 조화를 빌려 왔고 [酒知埏塡功 似借天工術], 가늘게 꽃무늬를 놓았는데[微微點花紋] 묘하게 화가의 솜씨와 같다[妙逼丹靑筆]고 하였다. 아! 고려 시인 이규보가 그토록 아름답다고 찬탄한 청자술잔은 어떤 것일까? 아쉽게도 시를 짓게 한 그 술잔의 행방을 알 수 없다. 그러나 그가 예찬했을 법한 종류의 청자술잔(혹은 찻잔)을 가늠해 볼 수 있다. 여러분이 국립전주박물관 미술실에 오셔서 이런 청자술잔을 찾아보시길 바란다. /김현정 국립전주박물관 학예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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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10.14 17:01

[박물관 유물로 읽는 옛 이야기] 붓끝으로 이룬 천지조화, 이정직 ‘서화첩’

학문에 더욱 힘쓰면서 감히 고인古人의 경지에 이르기를 기약하고 있습니다. 비록 고인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다 해도 스스로 실망하지 않을 것이고, 비록 세상에 쓰이지 못해도 스스로 후회하지 않을 것이며, 어느 누구 하나 나를 알아주는 이 없더라도 원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운명과 시대는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것이고, 운명과 시대 역시 내게 주어진 소명을 어찌할 수는 없을 것이니, 하늘이 나를 이 세상에 보낸 것에 대한 답을 할 뿐입니다. - 이정직이 황현에게 보내는 글에서 타고난 남다른 재능과 후천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석정石亭 이정직李定稷(1841-1910)은 과거 시험을 보지 않았고, 그래서 세상에 이름을 널리 알리지도 못했다. 그를 알아봐 주고 끌어줄 스승도 없었고, 그에게 그림과 글씨는 스승이자 친구이자 모든 것이었다. 고인의 경지에 이르고자 힘쓰는 것. 그것을 하늘이 내린 소명으로 삼는다는 말은, 그의 인생을 돌아볼 때 가슴 한 켠에 진한 울림을 준다. 갑오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났던 1894년, 전주에서 한약방을 운영하고 있던 그는 54세의 나이에 전 재산과 저작을 잃었다. 그러한 좌절을 딛고 김제로 돌아와 세상을 떠난 1910년까지 약 15년 동안 저술에 힘쓰고 서화에 매진하며 제자를 양성하였다. 옷을 걷어 부치고 제자가 되고자 찾아왔다. 계단에는 신발이 그득하였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그를 따르던 많은 제자들, 그림과 글씨, 시와 저술들이 그를 지탱해주었을 것이다. 이정직은 실제 매화보다 매화 그림이 더 좋다고 한 바 있다. 매화는 선비의 지조와 절개를 상징하여 그림으로 그려졌지만, 그림 속으로 들어가는 순간 묵향墨香을 머금고 자연 속 매화보다 훨씬 더 멋스럽다. 총 8책(314면)으로 이루어진 <서화첩>에는 모란, 연꽃, 수국, 포도, 매 梅난蘭국菊죽竹의 사군자 등이 담겨 있다. 그의 그림들은 화면 속에서 먹과 필법, 여백을 활용하여 천지조화를 이루며 잔잔한 묵향墨香을 전해준다. /민길홍 국립전주박물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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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10.07 17:40

[박물관 유물로 읽는 옛 이야기] 완주 상림리 출토 동주식동검(東周式銅劍)

2013년 2월 전주 중동, 전주완주 혁신도시 개발사업으로 한창 공사 중이던 예전의 완주군 이서면 상림리 206-1번지 일대를 답사하였다. 이곳은 1975년 11월 25일에 26점의 중국식 청동검이 발견된 장소다. 중국식동검은 그동안 알려져 왔던 요령식동검이나 한국식동검과는 형태상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어 발견 당시부터 주목되었다. 그로부터 38년이 흐른 후 일대는 사라졌고, 2014년 12월 2일부터 2015년 1월 25일까지 완주 상림리 청동검 테마전이, 2014년 12월 5일에는 완주 상림리 청동검의 재조명 학술대회가 열렸다. 40년 만에 보다 진전된 자료수집과 연구가 종합된 장이었다. 상림리 동검에 대한 연구는 수집 당시 전주시립박물관장이었던 故전영래 선생의 열정적인 노력에 의해 처음 소개되었다. 그러나 중국이라는 이질적인 요소와 당시에는 비교자료가 많지 않아 그 중요성이나 의의가 다소 약하게 전달되었다. 중국식동검은 자루와 몸체를 한 번에 주조한 형태로 일명 도씨검桃氏劍으로 불리며 최근 동주시대(기원전 770~221)에 사용된 것으로 보아 동주식동검이라 부른다. 이 동검은 춘추시대 후기에서 전국시대 초기에 출현하여 전국시대에 완성되었다. 또한 중국의 중심 분포 지역인 중원지역 이외에 중국 동북지역, 한반도, 일본 열도에서도 확인된다. 한반도에서의 출현은 대체로 기원전 3~2세기경으로 추정되는데 이때 중국에서는 동검이 단절되고 철검이 본격적으로 등장하였던 시기이다. 따라서 한반도 유입품은 무기로서의 실용보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가진 물품이었을 가능성이 항상 대두되었다. 완주 상림리 동검 또한 특별한 매장 시설 없이 일괄로 26점이 발견된 것을 볼 때 358점의 중세형동검이 발견된 일본의 시네마현 고진다니 유적이나 15점의 요녕식동검이 발견된 여순의 노철산 곽가둔 유적과 유사하게 의례적인 목적을 위한 매납 유구일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전시를 위한 본격적인 분석에서 동검의 세부적인 형태나 사용흔, 무게, 성분, 주조 상태가 서로 달라 26점이 모두 처음부터 매납을 위해 비실용적인 목적으로 제작된 것은 아니었다. 아울러 제작방법이나 과학적 분석 결과를 볼 때 제작에서 사용, 폐기까지의 서로 다른 과정을 겪은 동검이 섞여 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확인되었다. 그럼에도 대부분은 주석의 함유량이 낮아 경도가 떨어져 비실용적인 것이 많고 납 원료의 산지가 대부분 한반도로 추정되어 중국의 동검을 모방한 방제품이 많은 것으로 보인다. 2천 년 전 완주에서 국제적인 교류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직접적인 증거이다. 아울러 최근 보물로 지정된 완주 갈동 유적 청동거울이나 청동검 거푸집을 볼 때 당시 최신의 기술이 모인 곳이 완주였다. /최흥선 학예연구실장 직무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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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9.30 17:20

[박물관 유물로 읽는 옛 이야기] 분청사기 물고기무늬 항아리

말린 구연과 수직의 목, 그리고 둥근 어깨에서 사선으로 내려가면서 몸체를 이룬 듬직하고 넉넉한 분청사기항아리이다. 고창 용산리에서 출토되었다. 몸체 전면을 백토로 분장한 후 겹선으로 둘러 3단 문양대를 구성하였다. 목 아래부터 어깨까지 겹연판문대와 초화문대를 차례로 돌렸고, 그 아래에 활달한 필치로 물고기들을 표현하였다. 물고기들은 등지느러미를 활짝 펴고 연이어 헤엄치는 모습이다. 한 물고기는 기쁜 듯 새우를 입에 물었다. 연꽃 아래로 수초가 있는 물속에 물고기가 노니는 장면을 3단 문양대로 간략화한 것으로 보인다. 물고기무늬는 조선 자기뿐만 아니라 다른 공예품에서도 많이 사랑받는 길상적 소재였다. 물고기무늬는 물고기를 뜻하는 어魚가 여유 있다는 뜻의 여餘와 중국어 발음이 같아서 풍요로움과 여유를 뜻한다. 이와 함께 물고기는 알을 많이 낳기 때문에 다산과 자손번창을 의미한다. 그래서 연꽃과 물고기가 결합하면 해마다 풍족하고 여유 있으라는 연연유여年年有餘의 의미가 된다. 연꽃의 연蓮과 해의 연年이 발음이 같고, 어魚는 여餘와 중국어 발음이 같아서이다. 새우를 뜻하는 하蝦는 하賀와 음이 같아서 축하, 경사스러운 일을 의미한다. 그러고 보면 이 분청사기항아리는 듬직하고 넉넉한 모양새나 장식된 무늬처럼 항상 풍요롭고 여유로우며 경사가 있기를 바라는 기원을 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인류 역사상 가장 풍요로운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의 바람도 역시 그러하다. 우리는 어떻게 풍요와 여유를 누릴 수 있을까. 가만히 항아리 속을 들여다본다. 여기를 가득 채우기도 해야 하지만 깨끗이 비우기도 해야 하지 않을까. 순간 항아리 속 물고기가 춤을 춘다. /김현정 국립전주박물관 학예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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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9.23 17:28

[박물관 유물로 읽는 옛 이야기] 용비어천가

지금 방탄소년단이 음악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로 사로잡는다면, 세종대왕(재위 1418-1450)은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로 백성들의 마음을 모으고자 했다. 동양에서는 옛날부터 음악을 역할을 중요시했다. 노래가사에 반영된 백성들의 마음과 사회의 모습을 알기 위해 당시 유행하던 노래들을 수집하여 민심民心을 살폈고, 정치적 소문을 노래 가사로 지어 퍼트리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들이 애국가愛國歌를 들으며 마음을 굳게 다잡은 것, 현재 월드컵, 올림픽 등을 보며 응원가를 부르며 하나가 되고, 애국가를 들으며 숙연해지는 것도 노래가 가진 힘 덕분이다. 세종대왕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 중 한 명이다. 그는 우리나라의 실정에 맞는 농업서인 농사직설農事直設, 우리나라의 하늘에 맞는 시간과 달력을 담은 역법서 칠정산七政算, 우리나라 약재 정보를 담은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 등을 만드는 등 백성들에게 꼭 필요한 업적은 남겼다. 세종대왕의 눈부신 업적 중에서도 가장 비밀리에 진행되고 조심스러웠던 프로젝트가 우리말, 훈민정음의 창제이다. 당시 세종대왕은 두 가지 고민을 가지고 있었다. 훈민정음을 반대한 신하들을 설득하는 것과 조선이 고려를 뒤엎고 세운 나라라는 부정적인 생각을 가진 백성들의 마음을 돌리는 것이었다. 세종대왕은 이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훈민정음으로 조선 왕조의 창업을 칭송한 노래인 용비어천가의 가사를 쓰는 것을 선택했다. 왕이 되어 날아올라(龍飛) 하늘의 명에 따른다(御天)는 용비어천가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세종대왕은 조선의 건국이 하늘의 뜻을 따른 것임을 분명하게 하면서 조선 건국이 정당하다는 내용은 노래 가사에 가득 담아두었다. 백성들은 한글가사로 용비어천가 음악을 들으면서 조선 건국의 정당성을 받아들이기 시작했고, 학자들은 신성한 내용을 담아 백성에게 전하는 역할을 하는 훈민정음의 반포를 끝까지 반대하지 못하였다. 600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육룡이 나르샤, 뿌리 깊은 나무, 샘이 깊은 물 등의 용비어천가 속의 내용이 방송에도 사용되고 우리나라 국민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다는 점을 볼 때, 세종대왕의 음악을 활용한 전략이 잘 맞아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덕분에 조선은 국가의 기반을 탄탄하게 다졌고, 한글은 생명력을 얻어 우리의 문화는 더욱 풍성해졌다. 국립전주박물관 상설전시실 역사실에서 훈민정음으로 지은 첫 번째 작품이자 세종대왕의 깊은 고민이 담긴 용비어천가를 만날 수 있다. /이기현 국립전주박물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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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9.16 18:35

[박물관 유물로 읽는 옛 이야기] 기명절지도

서양에 정물화가 있다면, 우리나라에는 기명절지화가 있었다. 학식 있는 문인의 품격을 나타내는 고동기古銅器와 부귀, 장수, 다남 등 길상적인 의미를 가지는 꽃과 과일, 괴석怪石 등을 함께 그려서 궁중에서 민간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수요층을 가지고 활발히 제작되었다. 김용준金瑢俊(1904~1967)은 「오원일사吾園軼事」에서 그때까지 기명과 절지는 별로 그리는 화가가 없었던 것인데, 조선 화계에 절지, 기완 등 유類를 전문으로 보급시켜 놓은 것도 장승업張承業(18431897년)이 비롯하였다.라고 하였다. 장승업은 중국의 여러 그림을 소화하여 기명절지를 하나의 유형으로 창안하여 그리기 시작한 것인데, 붓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호방하고 대담한 필치, 지그재그로 기물이 가득 찬 구도 등은 장승업만의 특징이다. 이렇게 시작한 기명절지화는 안중식과 조석진을 거치며 20세기 초 한국 화단에서 크게 유행하였다. 이 그림은 2폭 가리개 형태의 병풍으로 그보다 10살 아래인 소림小琳 조석진趙錫晋(1853~1920)의 작품으로, 오른쪽에는 국화를 소재로 한 시詩가 적혀 있고, 위에서부터 국화, 향로, 아래에 무, 호박, 배추가 그려져 있다. 왼쪽에는 고색이 만연하다는 뜻의 고색임리古色淋漓라는 제목이 적혀 있고 소나무 분재, 벼루, 모란 꽃가지 등을 그렸으며, 정미년(1907년) 가평절嘉平節(12월 말)에 조석진이 그렸다는 제작시기와 그의 도장이 찍혀 있다. 각 소재의 용도와 의미가 유기적인 연관성을 가지지 않은 채 자연스럽고 보기 좋게 화면에 배열되는 것은 기명절지화 화면 구성의 중요한 특징이다. 이 그림 역시 지나치게 많은 물건들을 늘어놓지 않아 답답하지 않고, 필력이 뛰어난 화가의 손을 통해 단정한 먹선과 은은한 채색이 적절하게 어우러져 매우 우아한 아름다운 작품이 탄생하게 되었다. /민길홍 국립전주박물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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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9.09 17:51

[박물관 유물로 읽는 옛 이야기] 채용신이 그린 ‘무이구곡도’

중국에서 경치가 빼어나기로 유명했던 복건성 무이산武夷山의 아홉굽이를 그린 그림이다. 성리학을 집대성하여 주자朱子라 불리었던 중국 송나라 주희朱熹(1130~1200)가 이곳에 머물면서 강론과 저술에 몰두하였다 한다. 무이구곡도는 직접 가보지 못한 조선시대 문인들이 경치를 간접적으로나마 감상하기 위해 그려졌으며 또한, 주희의 학문적 공간을 볼 수 있고 그를 숭상하는 의미를 담아 그려졌던 그림이기도 하다. 조선에 본격적으로 들어온 것은 16세기경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퇴계退溪 이황李滉(1501~1570)도 세상에 전하는 무이도武夷圖는 꽤 많다고 기록에 남긴 바 있다. 그 후 다양한 변모를 보이며 조선말기까지 꾸준하게 그려졌다. 고종대 어진御眞 화사畵師 채용신도 여러 점의 무이구곡도를 남겼다. 그는 고종의 어진[초상]을 그렸던 인물로, 1905년 전북으로 내려와 우국지사를 포함하여 지역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초상화를 많이 그렸는데, 그 외에도 산수, 꽃과 새 등도 관심을 가지고 그렸다. 현재 기록과 작품으로 전하는 채용신의 무이구곡도는 총7점 정도 알려져 있어, 무이구곡 주제를 가장 많이 그린 화가로 손꼽힌다. 국립전주박물관 역사실에 현재 전시된 1915년의 제작연대가 있는 채용신필 <무이구곡도>는 총 10폭에 연속해서 펼쳐진 무이산의 경치와, 매 폭 상단에 적힌 무이도가武夷圖歌가 서로 어우러지며, 각 봉우리마다, 건물마다 친절하게 지명을 적어놓은 것도 특징이다. 제5폭에는 주희가 머물렀던 무이정사武夷精舍가 표현되어 있다. 그런데 상단의 무이도가는 글자를 좌우 거꾸로 적어 매우 흥미롭다. 이렇게 의도적으로 글자를 좌우 반전시켜 쓰기 위해 그는 왼손을 사용했을까? 글자를 좌우 거꾸로 쓰는 것이 어떻게 가능했으며, 왜 무이구곡도에만 저렇게 썼을까? 여러 가지 의문점이 남는다. 우리나라 그림에서 유례가 없으며 왜 이렇게 했는지에 대한 이유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민길홍 국립전주박물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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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9.02 18:17

[박물관 유물로 읽는 옛 이야기] 완주 은하리 돌방무덤

고고학적 연구자료 중에서 무덤은 과거 사회의 매장 양상과 장례 절차뿐만 아니라 당시의 정치체계나 사회구조와 식문화 등 세밀한 생활양상의 전반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정보를 제공해준다. 완주 봉동읍 은하리에서는 백제시대의 무덤이 확인되었는데, 2004년 2월 지역 주민이 선산에서 모친의 묘소를 조성하던 중 무덤의 천장돌과 토기 뚜껑 1점을 발견하면서 알려지게 되었다. 이 유적에서는 굴식돌방무덤 1기와 2기의 기와널무덤이 확인되었는데, 뚜껑이 있는 완과 금동제 귀걸이 등이 출토되었다. 흥미로운 점은 굴식돌방무덤에서 4개체의 인골이 확인되었다는 것이다. 수습된 인골은 머리와 다리 등 뼈의 일부만이 수습되었는데, 1차적으로 다른 곳에서 장례를 지낸 후 일부를 추려서 2차적으로 묻은 것으로 보인다. 고고학, 체질인류학, 생물학, 생물정보학 등의 분야에서 각각 분석해 본 결과 4개의 인골은 각각 2명의 남자와 2명의 여자로 밝혀졌다. 남녀 한 쌍은 모계를 통한 혈연관계에 있고, 나머지 둘은 모계로는 어느 인골과도 친연관계가 없음이 드러났다. 아마 남매 관계에 있는 인물들과 그 배우자들이 시차를 두고 차례로 매장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충남의 당진 우두리 유적에서는 이와 유사한 시기로 추정되는 인골이 조사되었다. 이 인골들과 비교해 본 결과 은하리 무덤주인들의 사회적 지위가 더 높았음에도 불구하고 동물성 단백질은 거의 섭취하지 않았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반면, 당진 우두리 유적에 묻힌 사람들은 상당히 많은 양의 동물성 단백질을 해양성 어패류를 중심으로 섭취한 것으로 분석되었다. 일반적으로 생각하기에 높은 신분의 사람들이 많은 양의 단백질을 섭취했을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여러 사회적 규범이나 관습에 의해 달랐을 가능성도 있는데, 이는 6세기 백제 사회 고위층 내에 깊숙이 퍼져있던 살생을 금하는 불교적 규범에 의한 결과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처럼 완주 은하리 굴식돌방무덤은 웅진기 백제 사회의 가족제도와 장례문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보여주고 있으며, 국립전주박물관 특별전 오로지 오롯한 고을, 완주(2019.6.17.~9.15.)에서 자세하게 확인해 볼 수 있다. /김왕국 국립전주박물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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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8.26 16:15

[박물관 유물로 읽는 옛 이야기] 청자상감동채연화당초문잔

소담한 느낌의 청자 잔이다. 이 잔은 살짝 내만한 구연에 측면은 곡선으로 아름답게 떨어진다. 청자의 바닥에는 마치 참깨 같은 규석을 받쳐 정성스럽게 구웠다. 이러한 잔은 차 또는 술을 담아 마셨을 것이다. 고려는 차를 마시고 즐겼던 차의 나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가에서는 왕실 중심의 행사에서 차를 준비하고 의례적인 일을 맡는 다방(茶房)을 운영하였다. 다방에서는 각종 다레(茶禮)를 주관하였다. 또한 고려는 차의 생산을 전담하는 다소(多所)를 운영하였다. 수도 개경에는 차를 마시는 다점(茶店)이 있었다. 이 곳은 차도 마시고 쉬어가는 누구나 드나들 수 있었다. 송나라 사신 서긍(徐兢)이 1124년에 쓴 <宣和奉使高麗圖經>에도 차 문화를 엿볼 수 있다. 권32 다조(茶俎)에서 근래에 와서는 고려인들도 차 마시는 것을 좋아하여 더욱 차 끓이는 용기를 만든다. 금화오잔(金花烏盞), 비색소구(翡色小甌), 은로탕정(銀爐湯鼎) 등은 모두 중국의 모양과 규격을 흉내 낸 것들이다.라고 하여 고려 중기, 고려인들도 차를 보편적으로 마셨으며, 찻그릇으로 금화오잔과 비색소구가 쓰였음을 알 수 있다. 비색소구는 비색의 작은 차를 마시는 청자 잔으로 추정되며 아마 이러한 형태의 잔에 해당될지도 모른다. 이 청자 잔은 푸른색 자체로도 아름답지만 안쪽에 표현된 무늬가 주목된다. 연꽃과 당초무늬가 잘 어우러졌는데, 연꽃잎을 보면 보기 드문 붉은 칠이 되어 있다. 이처럼 붉은색으로 발색되는 청자를 동화(銅畫)청자 또는 동채(銅彩)청자라고 한다. 동화청자는 산화동(酸化銅)의 안료로 그리고자 하는 부분에 칠하고 유약을 입힌 다음 환원소성을 한다. 이때 번조 조건이 알맞으면 이와 같은 붉은색으로 발색이 된다. 구리 안료는 높은 온도에서 쉽게 증발해 버리기 때문에 높은 온도에서 굽는 자기에 붉은 구리 안료를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은 고려 장인들의 뛰어난 기술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동화청자는 중국에도 예가 없어 고려인들이 청자에 창안한 창의성이 돋보이는 기법이다. 푸른색의 유약과 대비되는 강렬한 붉은색 때문에 무늬 중 강조하고 싶은 곳에 부분적으로 쓰이며 이는 무한한 생동감을 불어 넣는다. 전라북도 부안군 유천리 청자 가마터에서 동화 또는 동채기법으로 붉게 발색된 청자편들이 발견되어 그 생산지를 유추해 볼 수 있다. 이 잔에 맑은 술이나 차를 담았을 때 그 안으로 붉은 연꽃이 띄워져 있는 모습을 상상해보면 고려인들의 미감이 상당히 뛰어났음을 알 수 있다. 잔에 붉은색을 넣어 음료의 맛과 그릇이 주는 멋을 조화롭게 구사한 것이다. 작은 잔에 담긴 그들의 애정과 미감에 감탄할 따름이다. /서유리 국립전주박물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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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8.19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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