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음을 딛는 발의 감촉, 땅은 아직 마지막 봄의 기색을 머금고 촉촉하게 우리 몸의 무게를 견디어주고 있다. 하루이틀 사이 이 숲의, 들의 기운이 바뀌어 걸음은 먼지를 흩트리는 겨운 여름을 맞을 것이다. 고창 무장 용오정사(龍塢精舍) 가는 길은 100여 년 전 망국의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 머금었던 신산한 숨을 차분히 뱉어내는 길이다. 허파 깊이 닿는 투명한 공기에, 여린 초록이 무성한 길이다.
△용오정사에 깃든 한 시대의 의기, 용오 정관원(鄭官源) 선생
“우리 집이 무장현 사랑방이여.”
용오정사를 지키는 정계석 무장향교 유림회장 이야기다. 정사(精舍)의 내력을 청하는 짧은 시간에도 그의 거처는 몇 차례 지나는 손님들 맞는다. 대를 이어 향교 일을 도맡아온 그가 지금의 행정구역을 넘는 옛 시간을 소환한다. 무장현은 현재 고창군의 무장면을 비롯해, 대산, 해리, 심원, 상하, 성송, 공음면을 포괄하는 넓은 개념이다. 그 무장현의 사랑방을 지키는 정 회장은 용오정사의 용오 정관원(鄭官源) 선생의 증손이다.
용오 선생은 1894년 37세 나이로 성균관 진사에 올랐다. 1896년에는 일본에 맞서 장성의 기삼연(寄三衍) 선생과 의병을 일으켜 항일투쟁에 나선 의병장이기도 했다. 그는 고종의 석연찮은 죽음을 두고, 마을 뒤편 바위에 단을 쌓고 곡을 이어가다가 병으로 세상을 떠난다. 64세, 1920년의 일이다. 그가 단을 쌓고 세상의 울분을 울음으로 터뜨린 자리가 지금 용오정사다.
△뒤틀어지면서 균형을 이루는 곡선의 기둥, 사선으로 비껴 배치한 연기막이
용오정사는 대문으로 쓰인 외삼문을 지나, 강당으로 쓰인 경의당(敬義堂), 서재와 숙소로 쓰인 홍의재(弘毅齋)에서 내삼문 상운루(祥雲樓)를 거쳐 사당으로 용오 선생을 모신 덕림사(德林祠)까지 모두 다섯 건물을 이르는 통칭이다. 이 다섯 채 건물을 감싸고 채마다 허리께가 보일락말락 야트막한 담장을 두르고 있다.
경의당 현판은 이광사(李匡師)의 글씨로 알려져 있다. 들보와 기둥에 편액과 주련이 촘촘하다. ‘불가무차소(不可無此所)’는 추사의 스승 옹강방의 글씨로, ‘구수산방(求壽山房)’은 추사, ‘금성옥진(金聲玉振)’은 고종의 다섯째 아들 이강이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글씨만으로도 용오 선생과 이 가문의 ‘초연결’을 가늠하고 남는다. 앞 다섯 칸 옆 두 칸 팔작지붕 경의당 곁에는 홍의재가 있다. 글씨를 통해 세계의 구현을 읽었다면, 홍의재는 형태다. 다섯 채 건물에 솜씨로 혼을 불어넣은 이가 누구일까? 문득 궁금이 일어날 정도다. 그만한 집의 꼴, 용오정사의 첫글자 용(龍)의 꼴을 머금고 있기 때문이다. 건물의 기둥이 그야말로 자연 그대로이다. 용틀임으로 구불구불하기 이를 데 없는 나무기둥으로도 놀라울만치 가지런한 수평이 선을 이루었다. 100년을 넘도록 들보와 서까래의 직선을 지탱해온 곡선의 구부러진 힘 앞에 탄성이 터진다.
“이 홍의재에서 핵심은 연기막이예요.”
광주 아시아문화의전당 전문위원을 지낸 대목 조전환의 이야기다. 한국을 넘어 아시아, 세계 어느 건축물에서도 찾을 수 없는 형태라고 한다. 사선으로 기울어져 아궁이 연기가 건물에 올라 섞이지 않게 배치한 연기막이는 뒤틀어지면서 균형을 이루는 곡선의 기둥과 어쩌면 이렇게 적절하게 어울리는지.
△시대의 의기를 담고, 새로운 문화의 싹을 심은 솜씨가 만난 덕림사
용오 선생과 극재 정방규(鄭枋珪) 선생이 배향된 사당 덕림사는 용오정사를 대표하는 공간이다. 홍의재와 경의당을 지나 사당으로 가기 위해 내삼문인 상운루를 거쳐야 한다. 앞 세 칸 옆 단칸으로 솟을대문 맞배지붕 형태 건물이다. 가운데 문 양 옆으로 사다리 구조를 타고 눈을 옮기면 모정형태의 작은 누각이 있다. 드문 형태다. 누각의 난간 한편에는 오르는 거북이, 다른 한편에는 내려오는 거북이 있다.
덕림사는 용오정사를 대표하는 다포계 건축물이다. 갖가지 장식과 단청이 100년 세월을 머금고 화려를 버티어내고 있다. 사당 외벽을 둘러 절의 탱화 같은 벽화를 그려 그 화려에 점정을 보태는데, 그 안에 다른 문화의 싹을 심어두고 있다. 여느 벽화와 마찬가지 연꽃과 모란 그림 사이에서 서양 자동차며, 유럽 고풍스런 양식의 건축물 그림을 찾을 수 있다. 사당 내부 벽화에는 맥주병도 그려 넣었다. 파격이다.
홍의재를 만나며 건축가는 누구일까, 일었던 의문이 더 깊어진다. 사그라드는 시대의 한끝에서 모든 힘을 쏟아 수천 년 일궈온 문명의 일단을 담아, 꽃으로 피워낸 이는 또 누구일까? 그가 바로 대목장 유익서다.
유익서는 용오 선생과 비슷한 시기, 같은 공간을 살아낸 고창 사람이다. 1920년대 한 시대를 풍미한 정읍 입암의 보천교 십일전(十一展)을 지었던 사람이다. 그가 지은 보천교 십일전 가운데 하나는 서울 조계사에 옮겨져 대웅전이 되었고, 또 하나는 2012년 화재로 소실된 내장사 대웅전이 되었다. 유 대목의 솜씨가 용오 선생의 의기와 만나 이루어진 용오정사는 다른 건축물과 달리, 그 자리에서 같은 모양으로 100년을 버티어 의연하다.
△예술로부터 건축까지 우리 문화의 정수를 읽는 한권의 책, 용오정사
망국의 한을 당하여, 의병의 이름으로 저항을 수단으로 삼기도 하고 책을 모으고 후학을 통해 시대의 정수를 내려잇도록 안간힘 쓰던 한 시대는 이렇게 용오정사에 고스란하다. 용오정사 덕림사 벽에는 보수한 흔적이 남아있다. 누군가 벽을 뜯어내고 유물을 훔쳐간 흔적이다. 그 유물 가운데 하나가 선생의 초상이다. 선생을 닮은 물건이야 삿된 욕심으로 훔쳐가더라도 그의 의연한 정신이야 어찌 도둑질할 수 있을까.
매년 음력 9월 15일 정사에 모여 지역 유림들이 선생을 기리는 제를 올리고 있다. 건축에서부터 예술, 한 선비의 곧은 정신에서 우리 문화의 정수를 더불어 읽을 수 있다. 저문 한 시대를 비추어, 우리시대를, 다음 시대를 견주어 볼 수 있으니. /이영남 버들눈도서관장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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