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원 지리산 서쪽에는 호음실(虎音室)이란 마을이 있다. 마을의 지형이 호랑이가 누워있는 형국에다 마을 산인 호두산(현 견두산)에 호랑이가 많아 호랑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하여 불린 이름이다. 지금의 내호곡으로 개칭된 호음실 마을 안쪽은 죽산박씨(竹山朴氏)의 집성촌이 자리한 곳으로 격이 남다른 고택인 ‘몽심재’와 죽산박씨의 종가가 있다.
‘몽심재(夢心齋)’란 이름만 보면, 그저 꿈꾸는 마음으로 풍류의 장을 연 선비의 집인가 싶지만, 고려 말 충신 박문수의 지조 있는 정신을 이은 집이다. 박문수는 조선 건국에 반대하여 개성 근처의 두문동에 들어가고 가족들을 고향인 남원 초리로 내려보냈다. 지금의 수지면 초리에 내려온 죽산박씨 일가는 그곳에서 300여 년을 지냈는데 집안에 재화가 끊이지 않자 1700년 초반 옆 동네인 호곡리로 이주했다.
당시 종손인 박원유는 탁발하러 오는 스님을 늘 정성껏 공양했는데, 하루는 스님이 “어머니의 묫자리는 걱정하지 말라”이르고 돌아갔다. 얼마 뒤 모친이 세상을 뜬 다음 날 그 스님이 찾아와서 간밤에 어머니가 별세했는지를 묻고는 “산에 가면 그곳만 눈이 녹아 있는 터가 있으니 그 자리에 묘를 쓰면 자손이 흥할 것”이라 했다. 그래서인지 점지해 준 곳에 묫자리를 쓴 뒤로 세조 때 영의정을 지낸 박원형과 광해군 때 좌의정을 지낸 박홍구 등 두 명의 재상을 내었고, 많은 후손이 문과에 급제하면서 벼슬이 끊이질 않고 만석꾼 부자도 내며 융성한 명문가가 되었다.
‘몽심재’는 박동식(1736~1830년)이 지은 집의 사랑채 이름으로 박동식의 14대조인 박문수가 정몽주에게 충절을 다지며 보낸 시에서 유래했다. 도연명과 백이 숙제가 보여준 고결함과 지조를 빗대어 “마을을 등지고 늘어서 있는 버드나무는 도연명이 꿈꾸고 있는 듯하고, 산에 오르니 고사리는 백이 숙제의 마음을 토하는 것 같구나(隔洞柳眠元亮夢 登山薇吐伯夷心)”라 지은 시의 첫줄 끝 자인 몽(夢)자와 둘째 줄 끝 자인 심(心)자를 따서 ‘몽심재’라 지은 것이다.
지금은 국가민속문화재 제149호로 지정된 남원 몽심재를 몽심재 고택이라 칭하는데, 비탈진 사면에 앉힌 집의 구조가 독특하다. 집은 트인 ㅁ자형으로 경사진 지형을 살려 여러 채의 건물이 앞뒤로 높이를 달리하여 지어졌다. 솟을대문이 우뚝 선 문간채 동쪽에는 대청을 내어, 연못을 조망하기 가장 좋은 곳이어서인지 즐거움이 가득하다는 의미로 요요정(樂樂亭)이라 이름 짓고 하인들의 쉼터로 내주며 배려했다.
대문 안 정면에는 경사진 마당 위에 돌로 가지런히 축대를 쌓고 특이하게도 둥근 기둥이 아닌 팔각형의 기둥을 쓴 사랑채에 ‘몽심재’ 편액이 걸려있다. 안채와 사랑채 사이에 중문을 두었고, 사랑채 위 ㄷ자형으로 자리한 안채는 아궁이가 있는 아래층과 다락에 마루를 매달아 낸 2층의 독특한 구조로 되어있다.
또한, 비탈을 이용하여 돌과 바위를 놓고 꾸민 솜씨가 예사롭지 않은데, 앞마당에 있는 바위는 마음을 한군데에 집중해 잡념을 없앤다는 ‘주일무적’에서 따온 주일암과 존심대 등이 새겨져 있다. 지리산의 기운이 호두산을 타고 그 바위로 모인다니 그 덕에 이 집에 묵으면 큰 인물을 낳는다는 설도 있다. 네모난 연못과 돌로 조성된 물길도 주변 화초와 잘 어우러져 있으며, 너른 뒷마당에는 채마밭과 대나무숲이 조성되어 있어 조선 상류층 정원의 취향을 엿볼 수 있다.
몽심재의 주인은 박동식에서 박주현 박해창으로 이어지는데, 박주현(1844-1910년)은 문과에 급제하며 관직에 올라 승지를 지내다 러일전쟁 이후 벼슬을 버리고 귀향했다. 남원에 내려온 박주현을 일제가 포섭하려 했지만 응하지 않다가,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상해 임시정부에 독립자금을 조달하다가 체포되어 고문을 당한 후유증으로 안타깝게 순국했다.
박주현의 장남인 박해창(1876-1933년)에 이르러서는 만석꾼이 되어 당시 남원은 물론이고 구례까지 박씨 집안의 땅을 밟지 않고서는 길을 걸을 수 없을 정도라 했다. 이 시기 소작농들에게 추수한 곡식을 넉넉하게 배분하고 이웃에게도 후한 인심을 베풀고 학교(현 수지 초등학교)도 세웠다. 박해창의 둘째 아들은 경성법학전문학교(현 서울법대)를 나와 원불교의 헌법이라 할 수 있는 ‘교헌(敎憲)’을 제정한 원불교 상산 박장식 교무(1911~2011년)이다. 박장식은 물려받은 집(몽심재 옆 건물)을 원불교 교단으로 개조했으며 현재 몽심재도 원불교에 기증되어 원불교 재단에서 관리하고 있다.
박문수의 21대 후손이자 내호곡 이장인 박향기(1961년생)는 “몽심재와 종가는 인심 좋은 곳으로 소문나 과객들이 한양으로 가다 들리는 중간 기점이자 영호남의 교류를 꽃 피운 곳이지요. 아낌없이 베풀며 덕을 쌓은 죽산박씨의 ‘나눔과 배려의 철학’을 대대로 이은 곳”이라 전했다. 몽심재 옆에는 박문수를 모신 사당이 있는 종가가 ‘삼강문’이라는 편액을 걸고 자리하고 있다. 곧은 마음에 덕을 베풀어 번창한 죽산박씨는 매년 음력 2월 2일 사당에서 박문수의 제를 지낸다. 몽심재에 담긴 사연을 보며 그 가문과 집에 깃든 융숭한 의미를 되새겨 본다.
코로나로 인해 ‘슬기로운 집콕생활’이란 유행어가 생긴 요즘의 우리에게 있어 집이 지닌 의미는 무엇일까. 각자의 달라진 일상에서 진정한 치유의 장소로 살아갈 힘을 얻어야 할 곳이야말로 집일 것이다. 집의 의미가 남달라지는 지금 남원의 격조 높은 몽심재 들러 특별한 가문의 철학과 명당의 기운을 느껴보는 것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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