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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92) 임실 박사마을의 달달한 선물

‘엿장수 마음대로’라는 말이 있다. 똑같은 고물을 가져다줘도 때마다 받는 엿의 양을 늘리고 줄여 값을 쳐주듯이 무슨 일이든지 자기 마음대로 이랬다저랬다 하는 엿장수를 빗대는 말이다. 언제부터인지 엿장수를 찾아볼 수 없게 되었지만, 비대면 시대이다 보니 엿장수는 커녕 가까운 일가친척도 만날 수 없다. 세상일이란 진짜 엿장수 마음처럼 가늠하기 쉽지 않다.

 

풍속화 속 엿장수 모습: 김홍도 '씨름'(왼쪽)과 김준근 '엿 파는 아이'
풍속화 속 엿장수 모습: 김홍도 '씨름'(왼쪽)과 김준근 '엿 파는 아이'

엿을 파는 오랜 풍속은 김홍도의 <씨름> 과 김준근의 <엿 파는 아이> 에 등장하는 앳된 엿장수의 그림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엿장수는 엿 가락이 담긴 목판 양쪽을 천으로 묶어 목에 둘러 감고는 쩔그렁 쩔그렁 가위질을 하며 “엿이야 엿이야 / 어~엿 장수가 왔어요 / 울릉도 호박엿 강원도는 옥수수엿 / 경기도 찹쌀엿 전라도는 쌀엿 / 판다 판다 엿을 판다... ”라 구성지게 소리치며 장터와 골목을 누비고 다녔다.

엿장수가 엿을 팔며 부르는 소리는 손님을 불러 모으는 호객의 노동요이다. 각설이 타령과도 같은 타령조의 ‘엿타령’으로 엿장수 맘대로 개사하여 익살스럽게 부른 것을 재미삼아 따라 부르곤 했었다. 오래전부터 맛있는 간식거리였던 엿인지라 달달한 유혹의 소리가 들려오면 엿을 바꾸어 먹을만한 물건을 들고 가 엿장수가 쳐주는 엿값에 따라 환호를 지르거나 속상해하기도 했다.

엿을 바꾸어 먹으며 하는 놀이로 ‘엿치기’ 놀이가 있었는데, 엿가락을 부러뜨린 뒤 속에 난 구멍의 크기를 재거나 뚫린 구멍의 숫자를 재어서 ‘겨루는 놀이’이다. 엿 가락의 어느 부분을 부러뜨리냐에 따라서 엿값을 내야 했기 때문인지라 꽤나 신중하게 내기 모임을 했다. 그 구멍은 ‘엿 안에 공기를 넣어 뽑아 만드는’ 독특한 과정 때문에 생기는데 그 구멍이 성패를 가르게 하였다.

 

엿은 잡아당기면 끊어지지 않고 늘어나 계속 이어진다는 뜻의 ‘이어지다’, ‘잇다’에서 유래한 우리말이라 전해진다. 엿은 오래전 중국과의 교역을 통해 들어온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고려 이전 삼국 시기에도 곡물의 당화(糖化) 과정으로 즐긴 음식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그 유래를 알 수 없다.

최초의 기록으로는 고려 문인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에 “한식날 아무도 나를 찾아오지 않으니 ‘행당맥락(杏?麥酪)’이 모두가 나에게는 해당이 없구나”란 구절에 등장하는데 ‘행당’과 ‘맥락’을 엿으로 본다. ‘행당’은 은행을 갈아 쑨 죽에 엿을 넣어 먹는 중국풍습이 전해진 것으로 추측이 되며, ‘맥락’은 감주나 식혜와도 같은 것이니 고려 시기 이미 선조들이 엿의 단맛을 즐긴 것을 고증해 준 셈이다.

한자어로 되직한 엿을 당(?) 묽은 엿을 이(飴)이라 하는데, 식혜가 졸여져 굳기 전의 상태를 물엿, 조금 더 졸인 것을 조청이라고 하며, 굳힌 것을 갱엿이라고 한다. 그 갱엿을 먹기 좋게 늘어뜨려 공기를 넣어 뽑아 만든 것이 흔히 먹는 엿이다. 엿은 약으로도 쓰여 『동의보감』에도 나오는 처방법으로 약효를 가진 식물을 우려내어 그 물로 다리는 엿을 고(膏), 고제(膏劑)라고 하며 ‘약엿’으로도 불렸다.

조선 시기에는 엿 제조법이 『규합총서』등에 자세히 서술되어 있으며 관련 기록이 많이 있다. 『조선왕조실록』에도 궁 진상 품목으로 엿에 관한 기록들이 있는데, 특이한 기록으로는 영조시기 엿장수와 떡장수, 술장수들이 과거시험장에서까지 팔아대서 시험장이 소란스러워지고 있다고 질타하는 기록이 남아 있다. 정약용의 『흠흠신서』에는 엿장수가 엿값 시비 끝에 살인을 한 죄를 벌한 기록도 남아 있다. 당시 엿의 인기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구한말 엿장수 사진(왼쪽, 국립민속박물관 소장)과 『조선왕조실록』내 엿 관련 기사
구한말 엿장수 사진(왼쪽, 국립민속박물관 소장)과 『조선왕조실록』내 엿 관련 기사

엿 맛이 좋은 고을로 조선의 미식가 허균은 “개성에서 나는 엿이 상품이고 전주지방에서 나는 엿이 그다음으로 좋다”고 했으며, 조선 문인 이하곤도 전주에 들러 시장을 보고는 전주 사람들이 엿을 잘 만든다는 기록을 남겼다. 근래에 들어 임실 삼계의 박사마을 엿이 유명하다. 삼계는 유서 깊은 선비고을인데, 1600여 명의 인구에 200여 명의 박사를 낸 곳으로 전국에서 인구 대비 가장 많은 박사를 배출해 박사마을로 알려진 곳이다.

전통 방식으로 만들어져 입에 달라붙지 않고 맛도 좋지만, 시험을 치를 때 합격 엿을 먹는 풍습이 있어서인지 삼계에서 나는 ‘박사마을 쌀 엿’은 명물이 되었다. 엿이 산골 마을의 자산이 된 연유로는 원이숙(1949년생, 대한민국 식품명인 제80호) 명인의 꿈이 한몫했다. “고향 순창에서 어린 시절부터 솜씨 좋은 할머니와 친정어머니가 해주신 엿 맛과 집안의 풍습을 보며 자랐어요. 이맘때면 엿 고는 냄새로 집안에 단내가 났어요. 설날 세배 오는 손님들 상에 엿을 올리려 엿을 고았거든요. 달달한 집안 내음과 단지 안에 맛있던 엿이 추억이자 힘이었어요”

삼계 박사마을 엿과 원이숙 명인(대한민국 식품명인 80호)
삼계 박사마을 엿과 원이숙 명인(대한민국 식품명인 80호)

이후 명인은 임실 삼계 출신 남편과 결혼해 10년을 전주에서 살다 남편의 고향으로 돌아와 정미소를 하면서 솜씨 좋은 시어머니의 엿을 접하게 되었다. 그러다 부녀회장을 맡아 집집마다 전해져 오는 엿 제조 방식을 배우고 나눠 엿 만드는 일을 마을의 부업으로 자리하게하고는 사업체를 만들었다. 어렵게 살던 마을 사람들은 엿을 팔아 돈을 벌자 처음으로 통장을 만들고는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그녀를 명인으로 만들어준 엿은 ‘어린 시절 추억이자 선물’이 되었다고 한다.

설 대목을 앞둔 박사마을에는 엿을 고는 달달한 내음이 동네를 휘감는다. 하지만, 지난 추석에 이어 다가오는 구정 설날에도 엿을 나누고 덕담을 주고받는 우리의 풍습은 기대하기 어렵게 되었다. 마음대로 만날 수 없어 아쉽고 서글프지만, 따뜻한 안부를 선물처럼 건네며 나아질 일상을 달콤하게 꿈꾸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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