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지희 썰지연구소장
최근 내 친구의 생일이었다. 여태껏 우리 둘은 전주에 살고 있으나 거의 보지 못하였다. 친구의 생일을 맞아 그가 일하는 전주한옥마을에 찾아갔다. 한옥마을의 화창한 날씨가 가족들의 웃음소리와 발걸음을 빼곡히 매웠다. 친구는 공예품을 취급하는 가게에서 고요히 물건을 포장하고 있었다. 옹기, 목기, 나전칠함, 가죽그릇 등이 놓여있었다.내 눈을 사로잡은 건 나전칠함 자개들이다. 흑칠함 위에 1㎜ 정도 얇은 선을 두른 사람 형상의 자개들이 규칙적으로 붙어있었다. 지름 2㎝ 정도의 복잡한 형상을 줄음 질로 오려낸 모습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감탄이 아닌 통탄이었다. 줄음 질의 매력을 전혀 살리지 못하였다. 복잡한 모양새를 오리기 위해 고생했을 장인의 노고만 느껴질 뿐이었다. ‘왜 이런 도안이 탄생한 것일까’ 의문이 가득하던 찰나 친구의 대답은 간결했다. 유명 디자이너와 콜라보한 것이라고.
나전(螺鈿)은 전복, 야광패와 같은 조개껍데기의 안쪽 면을 무지갯빛이 돋보이도록 갈아내어 만든 자개를 옻칠 위에 다양한 모양새로 붙이는 장식 기법이다. 우리나라 나전기법으로 크게 줄음 질과 끊음질이 있다. 줄음 질은 도안에 맞춰 자개를 오려내어 붙이는 기법이다. 대개 모란과 같은 꽃, 동물 등을 표현할 때 사용한다. 끊음질은 자개를 실처럼 재단하고 칼로 끊어가며 문양을 만드는 기법이다. 육각형이나 교차되는 선 등 기하학적 문양을 표현한다. 줄음질은 면과 면이 만들어낸 회화적 표현이다. 가게에서 본 디자이너 콜라보 나전칠함은 왜 그런 문양을 줄음질로 만들었는지, 왜 그렇게 배치를 했는지 쉽게 납득가지 않았다.
분명 자개장, 나전칠함이 주는 한국의 복고와 아름다움이 있다. 고려시대부터 절정을 치달은 나전의 화려함에 추억이 더해진 공예품이기 때문이다. 2014년에 환수되어 2018년에 지정된 보물1975호 ‘나전경함’, 2019년 일본에서 국내로 환수된 ‘나전국화넝쿨무늬함’ 등이 명성을 뒷받침한다. 대부분의 전통기술 분야가 어려웠던 20세기에도 나전칠기는 고가품으로 꾸준히 팔렸다. 나전칠기 혹은 자개장이 주는 고풍스러움은 그때부터 형성되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는 여전히 나전칠기의 아름다움에 감탄하지만 이전처럼 소비하진 않는다.
2000년대부터 ‘전통공예 활성화’를 위해 국가기관 주도의 장인과 디자이너 협업 프로젝트가 이뤄졌다. 전통공예품은 기술과 가치는 높지만 쓰임이 현저히 낮다. 이를 디자이너와 협업하여 시대에 맞는 용도와 미감으로 다시 디자인한다(Redesign)는 취지이다. 그러나 예기치 못한 문제가 발생하였다. 주객이 전도된 것이다. 협업 디자이너들은 대개 서양디자인을 전공하였다. 때문에 전통기술의 충분한 이해 과정 없이 제품을 디자인하였다. 아무 존중과 논의 없이 장인은 그 디자인(도안)을 그대로 제작하는 외주업체로 전락한 사례가 생겼다. 전통기술 분야의 이해와 존중 없이 이뤄진 프로젝트는 일부 극단적인 사례를 만들었다. 협업이란 말이 무색하게 모든 작업물이 디자이너 이력으로 남거나, 장인에게는 주도권 없이 진행된 작업으로 기억되는 경우가 발생하였다.
콜라보의 좋은 사례는 점점 늘고 있다. 취프로젝트는 2017년 6월 크라우드펀딩 플랫폼 텀블벅(tumblbug)에서 〈인생을 닮은 전통 매듭 팔찌와 DIY키트〉를 진행하여 1,800만원을 달성하였다. 국가무형문화재 제22호 매듭장 이수자 박형민과 콜라보로 이뤄졌다. 매듭장이 끈목을 만들고, 취프로젝트가 DIY키트를 기획·제작하였다. 한국 매듭의 소재와 기법을 온전히 전달하되 색상과 용도를 이 시대에 맞춰 디자인했다. 한산소곡주가 2021년 5월 크라우드펀딩 플랫폼 와디즈(Wadiz)에서 〈홈술러를 위한 달콤한 인생술, 일오백 프로젝트〉를 펀딩하여 1,700만 원을 달성한 사례도 있다. 한산의 한달살기를 왔던 청년들과 한산소곡주 명인들의 협업으로 탄생한 프로젝트이다. 세련된 감성으로 디자인한 병에 명인이 주조한 소곡주를 담았다. 본질을 유지하고 이 시대에 맞는 방법으로 대중에게 전하였다.
장인과의 협업은 ‘전통기술의 이해’가 첫걸음이다. 그 걸음에는 존중이 동행해야 한다. 이전 세대부터 지금까지 우리는 왜 이 기술을 선택하고 발전시켜 왔는지 고민해야 한다. 어떤 재료, 기술, 쓰임이 있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가령 우리가 쓰는 스테인리스수저는 윗대부터 썼던 은수저, 유기수저의 맥락을 함께한다. 소반상 위에 밥과 국, 반찬을 함께 먹었던 풍습도 마찬가지다. 금속이라는 소재, 숟가락과 젓가락이라는 한 쌍, 20~23㎝ 길이는 한국의 문화유산인 것이다. 그렇다면 금속 외 소재를 쓴다거나, 숟가락과 젓가락 중 하나를 뺀다거나, 길이를 길게 늘리는 것과 같은 변화는 많은 논의가 필요하다. /설지희 썰지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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