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나들 그림자도 없었다. 굵은 황색선 밖엔 사람은커녕 그림자 한 뼘도 보이지 않았다. 세계 4위 높이 160m인 북한 인공기가 100m 높이에서 펄럭이는 우리나라 태극기와 게양대에서 춤을 춘다. 팔을 벌리면 곧 닿을 듯 지척인 거리에서 한나라이면서 둘이 된 국기가 빗물에 젖어 울고 있었다.
아, 북한! 한 발짝 폴짝 뛰면 내 발끝이 닿을 것만 같다. 저곳에 고향을 두고 온 실향민들의 가슴이 얼마나 새까만 재가 되었을까? 저 북녘 하늘에 뿌렸을 회한, 누구를 위한 분단이었던가. 내 나라를 내 맘대로 할 수 없었던 약소국가의 설움이 아직도 끝나지 않고 있다. 하루속히 우린 하나가 되어 우리 산하를 마음껏 누벼야 하지 않은가.
우리는 규정대로 셔틀버스를 타고 판문점에 도착했다. 판문점이란 이름은 개성 쪽 1Km 떨어진 '널문리'라는 마을에서 유래했단다. 정전협정 체결 이후 군사 정전위원회의 원만한 운영을 위해 군사분계선을 중심으로 UN측과 공산측 간의 공동경비구역을 설정하기로 합의했다. 그 규모는 동서 800m, 남북 400m에 달한다.
남측 지역에 '자유의 집'과 회담 시설 '평화의 집'이 있고 북측은 '판문각'과 '통일각'이 있다. 남북이 군사적으로 대치하고 있던 냉정의 상징에서 이제는 대화와 평화의 장으로 바뀌었다니 얼마나 다행인가. 자유의 집에 들어갔다. 남북한 직통전화가 개설된 곳이다. 숨통이 좀 트이는 듯 했다. 남북정상회담 후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함께 산책하며 담소를 나누었던 '도보다리'일부와 테이블이 전시되어 있었다. 도보다리 보수공사 덕분에 이곳으로 옮겨와 편하게 실내에서 그날을 상상했다. 그날 그대로 회담이 무르익어 통일까지 이루어졌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회담 장소를 조금 지나자 위풍당당하게 아름다운 반송이 서있다. 1953년 남북 정상이 함께 심은 소나무란다. 한라산 흙과 백두산의 흙으로 덮고 한강 물과 대동강 물을 함께 부었으니 무럭무럭 자라서 통일을 맞이해줬으면 참 좋겠다.
잘려진 38선의 허리엔 사람 발길이 드물어 천연기념물이 잘 보존되고 있었다. 민통선 안에도 군사시설 사이사이로 60여 세대 180여 명이 살고 있다. 이곳 농지는 경작권만 있고 소유권은 없으며 8개월을 의무적으로 살아야 한다. 고등학생 이상은 학교가 없는 관계로 8개월 주거의무는 면제다. 병원도 마트도 없어서 살기가 무척 불편하나 반면 납세의무와 병역 의무가 면제되는 특혜도 받는다. 하지만 철책선이 없어 대성동 주민 납치 사건이 종종 일어난다. 더욱이 아직도 미확인 지뢰가 남아있어 항상 위험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에 자정부터 새벽 6시까지 통금시간이고 주민들의 안전을 위해 민정병대가 파견되어있다.
휴전 협정 후 개인의 자유의사에 따라 포로 송환이 이루어졌다는 '돌아오지 않는 다리'는 미군 도끼 만행 사건 이후로 북한이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자 72시간 내로 다리를 만들어 사용했는데 그 다리 이름이 '72시간 다리'이다. 미류나무를 대신하여 검은 표지석이 그 날의 비극을 말없이 알려주고 있었다.
맑은 날에는 북측 30Km 까지 볼 수 있다는 기회를 끈질기게 내리는 비가 막아버렸다. 가녀린 손가락이 차디찬 방아쇠를 당기는 연습을 해야 하는 우리나라의 현실이 안타깝다. "황색 선을 넘지 마세요. 오른 쪽 흰색 실선 안에서만 촬영하세요." 돌아오는 차창에서 그 장병의 목소리가 내내 맴돌며 그 모습이 오늘도 눈에 선하다.
양영아 수필가는 <대한문학> 수필, <표현문학> 시로 등단했으며 전북수필문학회, 한국문인협회 회원 행촌수필문학회장을 맞고 있다. 수필집 <슴베>, <불춤>이 있으며 전북수필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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