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3일. 부산이 한국전쟁 중 피란수도로서 역할을 한 기간이다. 첫 번째는 1950년 8월 18일~10월 27일, 두 번째는 1951년 1월 3일~1953년 8월 15일이었다. 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전투가 벌어지지 않았던 부산은 피란민 수십만 명을 품는 포용력을 보여줬다.
△80만 피란민 품은 부산
부산일보사가 1980년대에 발간한 책 <비화 임시수도 천일>에 따르면, 한국전쟁 직전 부산 인구는 47만여 명이었다. 1945년 8·15 광복 직후만 해도 28만 명 수준이던 부산 인구는 일본과 중국 만주 등지에서 돌아온 동포 19만 명까지 더해 급증한다. 이어 전쟁이 발발하자 전국 각지에서 피란민이 몰려들어 100만 명을 넘는 사람이 치열한 생존 경쟁에 맞닥뜨리게 된다. 1·4후퇴 이후 부산의 최대 인구는 120만~130만 명 수준으로 추산된다.
당장 살 곳을 마련하는 것부터가 난관이었다. 일부 시민이 남는 방을 빌려주며 도움을 베풀었지만, 피란민 수십만 명을 수용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정부가 마련한 천막이나 수용소도 턱없이 부족한 형편이었다. 창고와 교회 예배당, 공장, 극장 등 빈 공간이 있는 곳은 모두 피란민에게 개방됐다. ‘동아일보’ 1950년 12월 28일 자 기사에 따르면, ‘부산시 당국에서는 시내에 들어온 피란민 6만여 명을 각 가정에 분산 수용키로 결정했다. 요정, 여관 등을 일체 개방해 피란민을 수용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부산연구원 오재환 부원장은 “부산은 한국전쟁 시기에 직접적인 전투가 없었던 평화 도시, 밀려오는 피란민을 품은 포용의 도시였다”며 “유엔 등으로부터 국제적 지원을 받던 곳에서 이제는 이를 되돌려주는 도시로 성장해 월드엑스포 유치에까지 나서게 됐다”고 설명했다.
2020년 3월 25일 <부산일보>에는 특별한 광고가 실렸다. 제목은 ‘부산 시민들께 드리는 감사의 말씀’. “저의 함경도 출신 선친과 서울 출신 어머니가 몇 번이나 하셨던 말씀은 ‘그때 부산 사람들 아니었으면 피란민들 다 얼어 죽고 굶어 죽었다. 자신들도 어려운 형편에서 대한민국 어디 사람도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이었습니다.”(어느 6·25 부산 피란민과 그분들의 자식 올림)
△소 막사·묘지도 집터로
전쟁 시기 부산에는 불어난 인구를 감당할 주택이 부족했다. 피란민이 지은 판잣집이 줄줄이 산자락은 물론 산등성이를 타고 오르며 늘어났다. 마구간이나 소 막사 같은 축사까지 피란민의 거처가 된다. 대표적인 곳이 남구 우암동 소막마을이다. 소막마을은 일본이 일제강점기에 수탈한 소를 일본으로 보낼 배에 싣기 전 검역하던 곳이다. 검역 전 소를 대기시키던 막사까지 전쟁 때 피란민 수용시설로 활용된다. 당시 이곳은 ‘적기(赤崎) 피란민수용소’라고 불렸다. 우암동이 바다에서 보면 붉은 언덕처럼 보인다고 해서 일본인이 ‘아카사키’라고 불렀던 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2021년 부산시가 펴낸 구술 채록·자료집 '피란, 그때 그 사람들'에서 우암동 출신 장두익 씨는 피란민 친구의 집과 의사소통 문제에 대해 이렇게 묘사한다. ‘방인지 부엌인지. 뭐 그릇 몇 개 놔두고 부엌이고. 원시생활하고 똑같지. 우암2동은 거의 다 소 막사였고. 그리고 어릴 때 들어보면 이북 말투가 좀 다르잖아요. 무슨 말인지는 잘 못 알아듣고.’
소 막사뿐만이 아니다. 사람들이 꺼리는 공동묘지까지 피란민 주거지가 된다. 서구 아미동 비석마을은 죽은 자의 공간이었던 묘지까지 삶의 공간으로 바뀐 곳이다. 피란민의 강인한 생존 의지를 확인시켜 주는 사례다.
피란민은 평지에 살 곳이 부족해지자 산복도로 곳곳에 판자촌을 형성한다. 공동묘지와 화장장이 있어 사람들이 살기 꺼리던 아미동도 마다할 처지가 아니었다. 오히려 건축 자재가 부족하던 전쟁기에 단단한 묘비와 상석은 집을 지을 요긴한 재료가 돼줬다. 지금도 비석마을에 가면 담장 아래에 남은 묘비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화재·식수·오물과의 전쟁
1953년 정전 직후를 기준으로 부산 시내 전체의 판잣집은 4만여 채에 달했다. 대청동과 보수동, 용두산 산비탈 등 중구 일대에만 최소 1만 5000여 채의 판잣집이 있었던 것으로 추산된다.
깡통을 펴서 만든 양철판과 상자 등으로 대충 지은 판잣집은 화재에 취약했다. 불이 어찌나 자주 났던지 하루 평균 3~4건이 발생한 것으로 전해진다. ‘섰다 하면 교회요, 났다 하면 불이다’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였다. 1953년 1월에는 국제시장 대화재로 상가 4200여 채가 불탔고, 이재민 3만여 명이 발생했다.
위생 문제도 심각했다. 상하수도 시설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아 공동 수도와 공동 변소를 줄 서서 사용했다. 이마저도 없는 곳에서는 다들 오물을 밟고 다니기 일쑤였다. ‘터질 듯한 부산은 주택난·식수난·식량난의 소동 속에 먼지와 쓰레기에 싸여있다.’ 1951년 2월 1일 자 <부산일보> 사회면 기사의 일부다.
일제강점기에 부산의 기반시설은 인구 30만 명에 맞춰져 있었다. 시내 4개 정수장에서 생산되는 수돗물은 하루 3만 3000t에 불과했다. 식수 부족으로 인한 ‘물 전쟁’이 특히 피란민을 힘들게 했다. 인심 좋은 부산 사람도 물을 나눠주는 데에는 인색했다. 오죽하면 ‘밥 한 그릇은 줘도 물 한 사발은 줄 수 없다’는 말까지 생겨났을까. 우물과 수도에 자물쇠를 채우는가 하면 드럼통에 물을 넣고 다니며 파는 물장사도 등장했다.
1951년과 1952년에는 흉년이 들어 전국 각지 유랑민까지 부산으로 몰려왔다. 당시 부산YWCA 부녀회원들은 굶기를 밥 먹듯 하는 피란민을 그냥 볼 수 없어 중앙동에서 ‘우유죽’ 배급을 시작한다. 우유죽은 분유에다 푹 삶은 보리쌀을 섞어 만든 죽이다.
전쟁 시기에 생겨난 또 다른 음식은 꿀꿀이죽, 일명 ‘유엔탕’이다. 미군 부대에서 버린 음식 찌꺼기를 수거해 끓인 음식이다. 피란민들은 꿀꿀이죽 장사, 미제 깡통을 펴서 판잣집 지붕 따위를 만드는 ‘깡깡이업’ 등 각종 밥벌이 수단을 찾아 생계를 이어갔다. 부산대 한국민족문화연구소 차철욱 소장은 “당시 부산은 절체절명의 생존 경쟁에 내몰린 피란민들이 뿜어내는 에너지로 가득했다”며 “이북에서 내려온 부유층, 고학력자도 체면을 떨쳐내고 낯선 생활에 적응해야 했다. 이런 유연한 대처 역시 피란 시기 부산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말했다.
부산일보=이자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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